4·3 당시 도민 학살 막아낸 문상길 중위 조명 절실
4·3 당시 도민 학살 막아낸 문상길 중위 조명 절실
  • 고경호 기자
  • 승인 2018.12.10 18: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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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중위, 1948년 부하들과 함께 박경진 대령 암살
박 대령 “30만 도민 희생해야” 주장하며 학살 주도
본지, 문 중위 총살형 보도된 ‘호남신문’ 지면 확보
문상길 중위 사형 총살 기사 호남신문-1948년 9월25일자 2면

속보=제주4·3의 비극을 현장에서 취재한 ‘호남신문’의 기획 기사가 공개된 가운데(본지 12월 10일자 1면 보도) 당시 도민 학살을 주도했던 군 수뇌부를 암살한 문상길 육군 중위에 대한 기사도 추가로 발굴됐다.

무고한 도민들을 대량 학살에서 막아내기 위해 목숨을 바친 문 중위에 대한 지역사회의 조명이 요구되고 있다.

본지는 호남신문이 1948년 7월에 기획 보도한 ‘동란의 제주도를 찾아서’ 1~7회를 발굴, 소개한데 이어 1948년 9월 25일 2면에 보도된 문 중위 사형 집행 기사를 추가로 확보했다.

해당 기사는 ‘제주사건 문 중위 등 23일 드디어 총살형을 집행’이라는 제목으로 보도됐다.

주요 내용은 ‘제주도 폭동 진압 총 지휘관인 경비대 육군 대령 박경진을 살해한 육군 중위 문상길 등 4명을 23일 총살했다’이다.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 따르면 문 중위는 육사 3기로, 제주4·3이 발발한 1948년 당시 모슬포 제9연대에서 중대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당시 제주 주둔 제11연대 연대장으로 부임한 박진경 대령은 “제주도 폭동 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선 제주도민 30만을 희생시키더라도 무방하다”고 주장했던 학살 주동자로 미군의 전폭적인 신임을 얻고 있었다.

문 중위는 도민들에 대한 대량 학살을 막기 위해 손선호 하사와 배경용 하사, 양회천 이등상사, 이정우 하사, 신상우 하사, 강승규 하사, 황주복 하사, 김정도 하사 등 8명의 부하들과 함께 1948년 6월 18일 새벽 숙소를 급습해 박 대령을 암살했다.

이후 1948년 7월 12일 서울로 압송된 문 중위 등은 법정에 서서 “이 법정은 미군정의 법정이며, 미군정 장관의 총애를 받던 박 대령의 살해범을 재판하는 인간들로 구성된 법정”이라며 “우리가 군인으로서 자기 직속상관을 살해하고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죽음을 결심하고 행동한 것”이라고 진술했다.

이어 “재판장 이하 모든 법관들도 모두 우리 민족이기에 우리가 민족 반역자를 처형한 것에 대해 공감을 가질 줄로 안다”며 “우리에게 총살형을 선고하는 데 대해 민족적인 양심으로 대단히 고민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조금도 원한을 갖지 않는다”고 말했다.

호남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결국 문 중위를 포함한 4명은 9월 23일 경기도 수색 기지에서 총살 당했다.

문 중위에 대한 미군법재판의 총살형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제1호 사형 집행이다.

지난 6일 4·3도민연대가 개최한 ‘제주4·3과 여순항쟁 70주년 기념토론회’에서 주제발표에 나선 주철희 박사는 문 중위의 희생을 언급했다.

주 박사는 “이 자리에 있는 제주4·3희생자유족회 유족들은 23살 청년 문상길을 역사에서 복원시켜야 한다”며 “그는 도민들의 부모님과 삼촌, 형제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았기 때문이다”고 강조했다.

이어 “제주에는 도민들을 대량 학살에서 구해낸 문 중위에 대한 표지석조차 없다”며 “문 중위와 그의 부하들을 조명하기 위한 지역사회의 관심이 필요하다”고 주문했다.

고경호 기자  kkh@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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