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한국전쟁과 피란으로 시국이 어수선하던 1950년대도 ‘다방’이라는 ‘공용공간’에서 뜻 맞는 이들의 문학 활동은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소리없는 움직임으로 드러났다.
1960년대 역시 4·19혁명과 5·16군사쿠데타로 도민을 비롯한 국민들의 민주화에 대한 갈망은 거세져 갔지만 이는 오히려 제주예술계의 활발한 활동을 부추기는 자극제가 됐다.
작은 모임에서부터 전시까지 예술계 움직임에 물꼬를 튼 1950년대에서 바통을 이어받은 1960~1970년대 제주의 다방은 단순한 ‘공간’의 개념을 뛰어넘어 ‘예술을 펼쳐 보이는 마당’으로서 전성기를 맞는다.
1960년대 문화의 발상은 주로 소라다방을 비롯해 산호다방·호수다방·백록다방·회심다방 등에서 이뤄졌다.
이 시기 다방들은 저마다 특색 갖춘 이야기들로 사람들의 눈과 귀를 자극했다. 특히 문인들의 총집결지로서 가장 많은 전시가 열렸던 ‘소라다방’은 해설을 첨가한 클래식 음악을 틀어 번화가에서 ‘폼 좀 잡네’ 하는 대인배들의 발길을 머물게 했다.
제주시 동문로 조일약국 근처에서 현재 금강제화 자리 지하로 둥지를 옮긴 산호다방은 1969년 4월에 창립한 ‘토요구락부’의 아지트이기도 했다. 이들은 매주 토요일마다 다방에서 만나 국내·외 발표된 문학 작품에 대한 토론을 벌였고 가끔 회원 개개인의 작품 낭독과 합평회도 하며 문학 갈증을 해소했다.
산호다방은 또 1969년 제8회 한라문화제의 ‘문학의 밤’ 행사 때 ‘제주문학의 걸어온 길’(양중해)·‘제주도, 이 채석장에 선 문학인이 반성할 점’(김시태)·‘제주문학의 장래’(김영화) 등의 연제(演題)로 문학 강연도 개최됐을 정도로 문학의 산실 역할을 톡톡히 했다.
서예전을 위한 모임은 주로 호수다방에서 이뤄졌다. 1957년 국전에 입선해 제2대 제주미술협회장을 역임한 소암 현중화 선생이 후학을 양성하며 자주 찾던 곳 역시 이곳이어서 자연스럽게 서예 작품을 자주 올리는 곳으로 명성을 떨쳤다.
회심다방은 시와 사진을 전시하던 곳으로 유명하다. 1968년 1월 문학동호인들로 구성된 ‘시사진동인회’는 같은 해 12월 이곳에서 첫 시사전(詩寫展)을 필두로 그 후로도 6년 동안 다섯 번의 전시회를 열며 작품 감상의 기회를 제공했다.
그 시절 예술인들의 순수함을 엿볼 수 있는 사건(?)도 있었다. 1968년 1월 13일부터 원다방과 백록다방에서 열린 ‘오지산 동양화 개인전’이 그것이다. 이 전시에서는 작품을 살 수 있도록 한 것이 화근이 됐다. 당시 미술협회 회원들은 신문의 지면을 빌어 예술품을 상품적 가치로 여겨 매매를 목적으로 한 전시회라며 질타해 논란의 불씨가 됐다. 예술은 어떤 목적을 갖고 행해져서는 안 된다는 당시 예술인들의 순순한 의지가 여실히 드러난 것이다.
1960년대는 또 도외에서 활동하는 제주미술가들의 작품과도 조우 가능한 시기이기도 했던 만큼 교류의 다리가 조금씩 넓혀져 갔다. 당시 목포대학교에서 재직 중이던 양인옥 교수의 개인전이 요안다실에서 열렸다. 주로 목포와 광주 등지에서 활동하고 있던 그의 전시가 선보임으로써 그동안 중앙의 작품들을 공유할 기회가 적었던 제주미술인들에게는 ‘문화 자극’이 됐다.
현대사회는 돈이 많고 적음으로 그 사람의 가치가 우선 평가된다. 하지만 그 시절을 살았던 그들은 물질이 없어도 마음과 마음으로 통했다. 새 신, 새 옷을 사도 ‘착화식’ 한다며 커피를 돌리고, 커피 위에 계란 노른자 올려 먹는 ‘모닝커피’에 행복해했다. 비록 드세기로 유명했던 모 다방 ‘미스 남’의 눈밖에 나 그 다방에는 발도 못붙이게 될까봐 전전긍긍 했지만 ‘정(情)’ 만큼은 살아 있었던 그 시절이었다. 그래서 문학적 영감 또는 예술의 혼이 더 빛났는지도 모른다.
텔레비전·전화도 귀하던 시절 딱히 연락을 취하지 않더라도 어느 곳에 가면 꼭 있는 ‘터 잡이’를 중심으로 형성된 ‘다방문화’. 새삼 그 시절의 사람냄새가 그립다.
고현영 기자 hy0622@jejuilb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