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비’에 새길 4·3의 바른 이름 찾기 후속 과제
‘백비’에 새길 4·3의 바른 이름 찾기 후속 과제
  • 고경호 기자
  • 승인 2021.03.29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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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73주년, 완전한 해결을 행해] (2) 정명과 진상규명
제주4·3평화기념관의 ‘백비’(白碑). 사진=고경호 기자
제주4·3평화기념관의 ‘백비’(白碑). 사진=고경호 기자

제주4·3평화기념관에는 글을 새기지 못한 비석 ‘백비’(白碑)가 있다. 그리고 백비 앞에는 “언젠가 이 비에 제주4·3의 이름을 새기고 일으켜 세우리라”라고 적힌 안내판이 있다. 누워있는 백비가 세워지지 않는 한 4·3은 여전히 ‘이름 짓지 못한 역사’다. 4·3 정명(正名)은 수십 년 째 논의되고 있다. 그러나 각 시대의 역사적 인식에 따라 봉기, 항쟁, 폭동, 사태, 사건 등 다양하게 불리고 있다. 과거에서부터 미래 세대까지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4·3의 바른 이름을 정하는 일은 추가 진상조사와 함께 완전한 해결로 나아가는 과정에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다.

▲4·3특별법 제정 후 논의 본격화

문재인 대통령은 2018년 4월 3일 제70주년 4·3희생자추념일에 참석해 축사할 당시 ‘4·3’에 별다른 수식어를 붙이지 않았다.

이에 대해 청와대 측은 4·3이 올바른 이름을 찾을 수 있도록 잠시 공백을 두기 위해 ‘4·3사건’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다고 전했다.

4·3 정명에 대한 연구와 논의는 과거에서부터 이뤄져 왔지만 본격적으로 대두되기 시작한 시기는 4·3 60주년 즈음이다.

2000년 4·3특별법이 제정된 이후 진상조사가 이뤄지면서 후속 과제로 4·3 정명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러나 70주년을 넘어 80주년을 향해가는 현재까지도 4·3 정명은 과제로 남아 있다.

▲항쟁, 민중항쟁, 그리고 신중론

2008년 ‘제주4·3항쟁 – 저항과 아픔의 역사’를 저술한 양정심 제주4·3평화재단 조사연구실장은 제주4·3에 ‘항쟁’을 붙였다.

4·3 당시 도민들은 피해의 당사자이기에 앞서 단독선거를 저지함으로써 통일독립국가 수립의 의지를 보여준 항쟁의 당당한 주체들이었다는 점에 주목했다.

10년 뒤 2018년 10월 제주4·3 제70주년 범국민위원회가 서울시의회에서 개최한 ‘제주4·3, 이름 찾기(正名)’ 학술대회 당시 박태균 서울대 교수는 “4·3은 사건인가, 반란인가, 항쟁인가.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하고, 불법행위가 있었으며, 실패한 항쟁이며, 항쟁과 학살 중 어떤 부분을 중심에 놓을지 애매하다”고 강조했다.

또 같은 해 제주시청 앞에서 열린 ‘4·3 민중항쟁 70주년 정신 계승 범국민대회’에서는 4·3을 ‘민중항쟁’으로 선언하고, 백비 모형에 ‘4·3 민중항쟁’을 붓으로 새기는 퍼포먼스가 진행됐다.

불과 10년 사이 항쟁, 민중항쟁, ‘학살과 항쟁’ 사이의 신중론이 제기된 것처럼 4·3은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사회적 분위기와 전문가들의 연구 결과, 대중이 바라보는 4·3에 대한 인식에 따라 여러 이름으로 바뀌고 있으며, 이는 곧 정명이 오랜 시간 해결되지 않은 과제로 남아있는 이유다.

▲정명과 맞물리는 진상규명

4·3 정명은 진상규명과도 맞물린다. 

미국에 대한 책임 규명을 포함해 4·3의 진상을 보다 명확하고 정확하게 파악해야 바른 이름을 지을 수 있다는 목소리가 제기되고 있다.

최근 4·3특별법이 전부 개정되면서 추가 진상조사를 위한 법적 근거가 마련됐다.

행방불명 수형인을 비롯해 미국 정부가 보관하고 있는 4·3 관련 자료, 4·3에 대한 미국 책임 규명 등 2003년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가 발간한 ‘제주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에 담기지 못한 분야에 대한 추가 진상조사는 4·3의 완전한 해결을 위해 반드시 추진돼야 할 과제다.

[인터뷰] 4·3의 완전한 해결을 위한 과제는? ② 양정심 4·3평화재단 조사연구실장

 “4·3 역사화 늦추면서 끊임없이 정명 논의해야”

“4·3 정명에 대한 인식은 계속 변해왔다. 80주년이 되면 또 다를 것이고, 100주년이 되면 (4·3은) 진짜 역사로 남게 되는 세상이 올 것이다. 우리의 4·3, 제주도민의 4·3이기 때문에 이를 조금이라도 늦추면서 정명을 위해 끊임없이 논쟁해야 한다.”

양정심 제주4·3평화재단 조사연구실장은 29일 본지와의 인터뷰를 통해 4·3 정명이 완전한 해결을 위한 디딤돌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양 실장은 “4·3 당시 5·10 단독선거를 저지하고, 통일을 염원하고, 보다 나은 나라를 꿈꿨던 사람들은 학살의 광풍 속에 잊혀져갔다. 현대에 이르러 정명을 논할 때 ‘항쟁’이 논의되는 이유”라며 “그런데 1980년대의 ‘민중항쟁’은 활기차고 생생한 느낌이지만 21세기인 지금은 박제화된 표현으로 느낄 수 있다. 시간이 더욱 흘러 4·3이 역사에 남게 되는 세상이 오기 전에 정명에 대한 논의가 끊임없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역사화 되고 있는 4·3의 중간에 서 있는 지금이 4·3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기억할 것인지에 대해 논쟁해야 하는 지점”이라며 “우리의 마음속에 살아있는 역사로 4·3을 기억하기 위해서는 항쟁이든 저항적 측면이든 뭐든 다 꺼내 놓고 토론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다”고 피력했다.

한편 양 실장은 성균관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박사학위를 받으면서 박사 논문으로는 최초로 제주4·3을 다뤘으며, 고려대와 이화여대에서 연구 교수로 재직한 뒤 현재 조사연구실을 이끌면서 4·3 진상규명에 매진하고 있다.

 

고경호 기자  kkh@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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