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순어법의 힘
모순어법의 힘
  • 뉴제주일보
  • 승인 2015.11.17 2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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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한비자’ ‘난일 난세편’에 나오는 고사 한 도막.
전국시대 초나라 때, 창과 방패를 함께 파는 상인이 거리에 나앉아 “이 창으로 말할 것 같으면, 예리하기 이를 데 없어 어떤 방패라도 꿰뚫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방패를 보십시오. 이 방패의 견고함은 어떤 창이나 칼로도 꿰뚫지 못합니다”고 했다.

지켜보던 한 사람이 “그러면 그 창으로 당신의 그 방패를 찌르면 어떻게 되겠소?”라 묻자, 그 상인, 아무 대답도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한다.

어떤 방패도 꿰뚫는 창과 어떤 창도 막아내는 방패는 함께 성립할 수 없는 모순관계다. 이것이 있을 수 있는 관계처럼 말했으니 상인은 ‘모순율’을 어긴 것이다.

문학에서도 수사법으로 모순어법이란 말을 자주 쓴다.

원래 ‘모순’이란 세모진 창 ‘모(矛)’와 방패 ‘순(盾)’이란 단어가 만나 이뤄진 것으로, 말이나 행동의 앞뒤가 서로 맞지 않음을 뜻하는 말이다. 충무공이 120명의 수병과 12척의 전함으로 왜군 133척과 맞서 국운이 그의 손에 달린 절박한 상황에서 외친 말을 우리는 기억한다.

“必死卽生 必生卽死(죽기를 각오하면 살 길이 열리고 살 길을 먼저 생각하면 죽느니라.) 이어진 말이 “자, 전열을 갖추고 출격하라!”다. 명량대첩은 그렇게 이뤄졌고, 왜군의 패퇴로 누란(累卵)에서 나라를 건졌다.

이 ‘이순신 리더십’을 많은 지도층 인사들이 좌우명으로 삼는다. ‘반드시 죽으려 하면 살고 먼저 살고자 하면 죽는다’는 말, 모순어법의 극치다. 필사와 필생이라는 모순된 어구를 한데 묶음으로써 병사들의 신뢰와 자신감을 충천케 했다.

J 밀턴은 아담과 하와의 낙원상실의 대서사시 ‘실락원’에서 “당신의 옷자락은 어두우면서도 눈부시게 빛납니다”고 하나님의 외모를 묘사하고 있다. 하나님의 성스러운 모습을 마치 그리기라도 하듯 인상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모순어법은 반어법, 역설법 등과 함께 메시지를 강력하게 살리는 기교로 흔히 쓰인다. 겉으로는 모순 같지만 그 너머에 진실이 살아 숨 쉬는 효과적인 표현기교다. ‘지나친 배려가 장애를 낳는다, 군중 속의 고독, 텅 빈 충만, 쾌락의 고통, 찬란한 슬픔, 소리 없는 아우성, 침묵의 말, 자세한 요약….’ 그 예들이다.

SNS의 끔찍한 말에 놀랐다. “여기에 고양이 사료 주지 마. 잡히면 손목을 잘라 버린다.” 네 귀에 못질하듯 초록색 매직테이프로 붙인 사진 속 문구, 길고양이를 돌보는 ‘캣맘’에게 띄운 짧지만 섬뜩한 경고다. 말이 이 이상 독을 품을 수 없다.

우리 사회에 ‘싫어요’가 들끓는다. 어떤 대상에 대해 단지 ‘싫어요’가 아니라 ‘너무 싫으니 내 앞에 나타나지 말아 달라’는 식의 극단적 혐오감을 드러내는 사람이 갈수록 늘어나는 추세라 걱정스럽다. 특별히 자신에게 피해를 입힌 것도 아닌데, 단지 싫다는 이유로 온라인을 통해 혐오감을 확산하고 폭력이나 협박, 심지어 살인 등으로 혐오감을 표출해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고양이의 개체수가 늘어나면서 창궐 수준이다. 그렇다고 야생이 아니라 유해동물로 지정할 수도 없다 한다.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는 것을 그토록 혐오할 일인가. 고양이가 널려 있어 쥐 구경을 한 지 오래니, 잇속도 있다. 또 그 경고문이란 게 살벌해 가슴을 쓸어내리게 한다.

‘고양이를 너무 감싸면 새로운 피해를 부를지도 모릅니다.’ 뭐 이런 식의 모순어법, 상대의 입장을 존중하는 포용적이고 온화한 화법으로 유도하면 좋을 것인데….

자극을 주지 않으면서 신뢰로 뜻을 같이 하게 하는 것, 눈에 보이지 않는 모순어법의 힘이다. 말이 생각을 바꾸고 사회를 생기 있게, 밝게 하는 법이다.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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