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결핵’ 병마도 막지 못한 ‘예술혼’…다양한 실험으로 시대 고민 담아
‘폐결핵’ 병마도 막지 못한 ‘예술혼’…다양한 실험으로 시대 고민 담아
  • 박수진 기자
  • 승인 2016.02.01 19: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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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가 낳은 천재 화가 강태석 40주기(下)

 

강태석 화백이 지인들과 즐거운 하루를 보내고 있다.

강태석은 38세의 젊은 나이에 병마를 만나 세상을 등졌지만, 예술혼은 누구 못지않게 뜨겁게 타올랐다.

그는 1966년 제주시 ‘길다방’에서 대표작 가운데 일부로 알려진 ‘70%’와 ‘어부’등 40여 점으로 개인전을 열었다. 건강에 적신호가 켜졌지만 활발한 창작 활동으로 작품을 선보인 것이다. 그것도 잠시, 결국 건강이 극도로 나빠지면서 폐결핵이 그를 옥죄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그의 창작열은 빛을 냈다. 제주에서 개인전을 연 이듬해인 1967년 다시 상경한 그는 창작에 전념하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몸은 그의 의지를 따라가지 못했다.

지병이 돼 버린 폐결핵이 그를 끝없이 괴롭히자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경남 밀양에 있는 절을 찾았다. 요양지라고 할 수 있는 그곳에서 자신의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대화 시리즈’와 ‘상 시리즈’ 등이 탄생한다.

20대에서 30대로 넘어가는 시기인 1960년대 강태석은 서구의 거장들의 화법과 우리 토착성을 접목시키고자 노력했다. 피카소와 헨리 무어, 반 고흐, 이중섭 등의 화풍을 자신의 작품에 대입시키면서도 자신만의 독창적인 색깔로 표현하는 작업을 했다. 헨리 무어의 그림을 옮겨 놓은 것 같은 느낌의 ‘흙 붉은 오름’이 대표적이다. 이 작품은 건강한 대지의 여성성을 단순한 형태로 표현해, 풍요로운 생산을 잉태하는 지모신을 암시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대화’는 피카소의 여성 인물화를 연상케 한다. 또 ‘대화 시리즈’는 입체파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으며, ‘전설’에는 샤갈의 선과 색채가 생생히 살아있는 느낌을 준다.

결과적으로 그의 작품에는 피카소의 입체주의, 샤갈을 연상시키는 환상성, 모딜리아니의 형상성 등 20세기 현대미술의 모든 요소가 녹아들어있다. 그렇지만 강태석은 이런 서구의 경향들을 자신만의 색깔로 풀어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1973년 건강이 악화일로로 갔지만 서울 ‘예술화랑’에서 3번째 개인전을 열었다. 예술에 대한 놀라운 정신력이 개인전을 가능하게 했다.

그의 천재성은 문학으로도 나타났다. 1975년 2월 20일부터 3월 12일까지 제주일보의 전신인 ‘濟州新聞(제주신문)’에 글과 그림을 곁들여 13회 연재했다. 얼마 없어 제주시 ‘정다실’에서 4번째 개인전도 개최했다. 폐결핵이라는 병마가 그를 고통의 나락으로 끌어당기는 와중에도 혼신의 힘으로 예술혼을 불태웠다.

강태석 화백의 제자들이 그가 사망하고 보낸 편지.

그러나 그의 창작에 대한 열정은 여기까지였다. 1976년 2월 1일 강원도 속초에 있는 도립병원에서 38세로 짧은 생을 접었다. 한국 화단에서 자신만의 화풍을 당당하게 펼쳐 보이려던 그는 자신의 꿈을 미완으로 남기고 떠난 것이다.

천재 화가 강태석을 기리는 활동은 예상보다 빨리 이뤄졌다. 그가 타계한 지 3개월 뒤 제자 박유승과 고영석 등이 제주시 ‘대호다실’에서 강태석 유작전을 마련했다. 그가 남긴 40여 점의 작품이 도민들에게 공개됐다. 그로부터 4년 뒤인 1980년 11월 22일부터 30일까지 제주시 ‘동인미술관’에서도 ‘유작 초대전’이 열렸다. 2년 후에는 목석원 봅데강 출판사에서 ‘강태석 화백’이 출간돼 길지 않았던 그의 삶과 예술이 재조명됐다. 1991년 세종 갤러리에서 열린 ‘도내 작가 유작전’에도 그의 작품이 소개됐다. 2009년 제주현대미술관도 그의 유작전을 마련했다.

지난해 12월에는 끝까지 타오르지 못한 그의 열정을 기리는 ‘고(故) 강태석 화백 특별전’이 열려 주목을 받았다. 제주시민회관에서 개최된 ‘제주국제아트페어’ 일환으로 마련된 것이었다. 전시에는 민속자연사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31점과 그의 동생 강영자씨 11점, 문학평론가 김유정씨의 1점이 내걸렸다. 그의 미공개 작품들도 대거 공개돼 화단의 관심이 대단했다.

이종후 제주국제아트페어 조직위원장은 “당시 강태석 선생님만큼 다양한 실험을 한 미술인은 없었다”며 “그러면서도 동세대가 가지고 있는 고민을 치열하게 함께 하며 작업을 해왔다는 점이 우리를 이끌었다”고 설명했다.

강태석 화백의 동생 강영자씨가 그의 초상화를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의 동생이자 서각가인 강영자씨는  “장례식장에서 가족들이 나에게 ‘오빠의 생은 짧았지만 마음껏 그림을 그리다 갔으니 울지 말라’고 했다”며 “오빠는 돈과는 상관없이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그림으로 표현했던 사람”이라고 회고했다.

지난해 특별전과 관련 강씨는 “미술계 후배들이 오빠를 잊지 않고 전시를 열어줘서 고맙다”며 “오빠도 하늘에서 흐뭇하게 바라봤을 것 같다”고 미소지었다. <끝>
 

박수진 기자  psj89@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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