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는 바다, 뒤로는 한라산을 담은 별도봉 절경
앞으로는 바다, 뒤로는 한라산을 담은 별도봉 절경
  • 제주일보
  • 승인 2018.04.09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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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제18코스(제주원도심-조천올레)-칠머리당~별도연대 3.6㎞

[제주일보] # 별도봉 산책길

별도봉은 표고 136m, 둘레 2236m의 원추형 오름인데, 알오름 동쪽에 붙어 있다. 능선에 나무가 우거지지 않았기 때문에 한라산과 바다를 조망하기 좋아 시민들이 즐겨 찾는다. 산책길은 남쪽과 가운데 능선, 그리고 북쪽으로 이어져 있어 다양한 코스를 즐길 수 있다. 올레길은 알오름의 칠머리당 옆으로 나 있어 바다를 바라보며 걷도록 되어 있는데, 중간에 ‘애기 업은 돌’을 거친다. 고개처럼 생긴 곳에 서 있는 바위인데 마삭줄이 그 둘레를 감싸고 있다.

지금은 나무 때문에 가려져 있지만 이 돌 북쪽 30m쯤에는 낭떠러지 위에 솟은 바위가 있어, 과거 ‘자살 터’가 되었었다. 10여 년 전만 해도 길을 걸으면서 ‘다시 한 번 생각하라’라고 쓴 희미한 페인트 글씨를 볼 수 있었는데, 필자의 대학생 시절, 밤에 친구 셋이 그 바위 앞에서 막걸리를 따라 놓고 ‘자살’에 대해 토론 같지 않은 토론을 벌였던 기억이 난다. 올레길은 전에 북쪽 자락에서 바로 해변으로 내려가 ‘곤을동’ 옛터를 거치도록 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바로 동쪽으로 돌아 비석거리로 간다.

 

# 화북 비석거리

과거 별도포는 제주의 관문이었다. 그래서 지방관들이 부임하거나 이임할 때 대부분 이 포구를 거치게 되었었는데, 이곳에 세워놓은 비석군은 그들의 치적을 새긴 기념비 형태인 것들이다.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30호로 지정된 이 비석군은 모두 13기로 그 중에는 심하게 마모된 것도 있고, 그런대로 읽을 만한 것도 있다.

비석의 주인공은 주로 목사(牧使)들로 윤구동(尹久東), 이원달(李源達), 이현공(李玄功), 백희수(白希洙), 구재룡(具載龍), 홍규(洪圭), 심상연(沈相演), 장인식(張寅植), 임헌대(任憲大) 등 선정을 베풀었다거나 가난 구제 같은 휼민(恤民)이 그 내용이다. 이는 목사가 의당히 실천해야 할 임무인데도, 유독 주민들이 자원해 그 은혜를 기려 세웠다는 변명 같은 내용 자체가 민폐인 것 같아 조금은 부끄럽다. 이 중 김봉옥 선생의 ‘제주통사’, ‘선정을 베푼 관리’ 명단에 나온 목사가 서너 명 있기는 하다.

 

별도봉 산책로에 있는 애기 업은 돌

# 곤을동과 환해장성의 자취

비석거리를 벗어나 바닷가로 가다가 곤을동 옛터에 들어가 보기로 했다. 안에는 곤을동 4․3유적지 조감도와 해원상생 거욱대를 세우고 해설을 덧붙였다. ‘1949년 1월 4일 오후 3~4시 경 불시에 들이닥친 군인 토벌대에 의해 가옥이 전소되고 주민들이 희생당했다. 집과 사람은 오간 데 없고, 돌담만 남아 이 억울하고 원통한 사실을 기억하게 하는 초토화된 마을 유적 터에 55년이 지난 오늘에야 온 도민들의 마음을 모아 해원상생의 굿판을 벌여 이를 위무하고, 이곳에 옛 조상들이 그랬듯이 다시는 이러한 일이 발생하지 않기를 기원하며 이 거욱대를 세운다’라 새겼다.

눈물겨운 사연에 먹먹해져 한참 있다가 걸어 나와 해안가로 접어드는데, 환해장성의 자취가 보인다. 이곳 곤을동 환해장성은 바다와 경작지 사이에 축조돼 약 140m가 남아 있는데, 높이 3~3.8m에 너비는 약 1.8m 정도로 성 위에는 너비 1.2m의 회곽도가 설치돼 있고, 높이 약 1.3m 내외의 여장도 부분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 화북성조, 그리고 해신사

해안도로를 걸어 이중, 삼중의 방파제 안에 세워진 배들을 바라보며 다시 마을 안으로 들어선다. 탐라순력도(2702년) ‘화북성조(禾北城操)’의 그림과는 많이 바뀐 구조이지만 아직도 서쪽 편 바다가 마을 쪽으로 들어간 채로 있어 옛 모습이 상상된다. 바다로 통하는 길옆으로 화북진성의 자취가 울타리처럼 남아 있다. 이형상 목사가 이곳을 거친 날은 점심때였는데, 당시 조방장 이희지(李喜枝)가 거느리는 성정군 172명과 군기, 집무를 점검했다.

포구의 작은 기와집은 지방기념물 제22호 해신사(海神祠)다. 안내문에 따르면 순조 20년(1820)에 한상묵 목사가 해상활동의 안전을 기원할 목적으로 지었고, 헌종 15년(1849) 장인식 목사에 의해 위패가 안치됐다. 일제강점기 이후에는 마을의 어부와 해녀들을 중심으로 해상의 무사고와 풍요를 비는 제사로 변했다가, 근래 들어 마을전체의 무사안녕과 생업의 풍요를 기원하는 마을제로 바뀌었다.

 

# 환해장성과 별도연대

포구에 오래된 비석이 둘 있고 옆에 한자로 새긴 표석이 하나 있는데, 김정 목사의 ‘화북포 시역시 고유문’이다. 항만이 불완전해 풍랑이 일 때마다 항내에서 파선되는 일이 자주 일어나자 영조 13년(1737) 김정 목사가 몸소 돌을 지어 나르는 등 앞장서 방파제와 선착장을 축조했다. 그러다 불행하게도 목사는 이임을 앞두고 과로로 쓰러져 유명을 달리했다고 한다.

그런 사연을 아는지 모르는지 포구 안 조그만 바위에선 갈매기들이 졸고, 바람에 굽은 팽나무가 손짓한다. 공터로 나아가보니, 환해장성을 거창하게 복원해 놓았다. 2001년부터 시작된 복원작업은 근 7년여에 걸쳐 620m에 이르는 환해장성을 높이 2.5m, 너비 1.2m로 정비해 놓았다. 너무 각이 세고 미끈해 옛 모습은 상상이 잘 안 된다.

별도연대 역시 새롭게 복원되었다. 연대는 해변에 돌로 높게 쌓아올린 형태로 높이와 너비가 각각 10척 내외였다. 그곳에서 주변 바다와 해안을 감시하다 소속 읍성이나 진성, 그리고 이웃한 연대로 알리던 시설인데, 보통 별장 6명과 연군 12명을 배치 운영하도록 했다. 동쪽으로 원당봉수, 서쪽으로 사라봉수와 교신했던 별도연대는 붕괴된 상태로 방치해오다 1998년 12월에 고증을 거쳐 2001년에 복원, 지금은 도기념물 23-9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계속>

<김창집 본사 객원 大기자>

제주일보 기자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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