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명과 정결, 청빈의 삶
순명과 정결, 청빈의 삶
  • 김종배 상임 논설고문
  • 승인 2016.01.31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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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성당의 일이다. 며칠전 제주시내 한 성당의 원로 신부가 한경면 용수리의 모 기념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사실상 은퇴나 다름없는 인사발령이었다. 기념관은 관리 직원을 빼면 신자가 한 명도 없는 곳이다. 어쩌다 순례객과 관광객이 가끔 들를 뿐 제주에서도 외진 지역이다. 70대 중반의 연로한 사제가 거처하기가 마땅치 않았지만 순명으로 받아들이며 떠나는 사제를 바라보는 신자들의 마음은 안타까웠다. 사제가 다른 곳으로 이동하게 되면 조촐한 환송식 자리를 마련하는 게 보통이다. 오랫동안 본당을 위해 사목활동을 해온 사제의 노고에 대한 치하 차원이다.

그런데 원로 신부는 모든 행사를 사양했다. 모든 것을 당신 탓으로 돌리며 늘 검소한 모습으로 신자들의 신뢰를 받아왔던 사제는 은퇴식은 고사하고 환송식마저 거듭거듭 거절하면서 조용히 떠났다. 신자들은 원로 신부에 대한 마지막 대접을 소홀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면서도 사제의 숭고한 뜻을 저버릴 수 없어 간소한 점심으로 대신했다고 한다. 요즘으로서는 흔치 않은 사제의 모습이었다.

 

양 냄새가 나는 사제

항상 낮은 자세로 모든 이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는 프란치스코 교황은 취임초 사제들에게 “양 냄새가 나는 사제가 되라”고 권고했다. 목자(牧者)에게서는 양 냄새가 나야 한다는 것이다. 맛난 음식으로 고귀하고 향기로운 냄새가 나는 사제보다는 더러운 양 냄새가 나는 사제야말로 참다운 착한 목자라는 말씀이셨다. 착한 목자의 아름다움은 양 떼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큰 사랑에 있기 때문이다. 사제에게서 재물이나 권위주의의 냄새가 나서는 안 된다.

권위와 권위주의는 다르다. 권위는 어떤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인정해주는 힘이다. 반면에 권위주의는 권력이나 위력으로 남을 억누르거나 권위에 맹목적으로 복종시키려는 행동을 말한다. 권위는 타인이 주는 것이라면, 권위주의는 타인에게 강요하는 것이다. 비록 성직자일망정 신자를 강제로 억누르거나 권위에 맹목적으로 복종케 하는 것은 권위주의이다. 성서에서 보면 예수의 가르침에는 권위가 있다고 했다. 권위주의가 아니었다. 억지로 강요하는 권위주의였다면 예수의 가르침은 2천년을 넘게 이어올 수 없었을 것이다.

 

권위와 권위주의

사제들은 사제복으로 갈아 입는 순간 교회가 주는 권위와 함께 권위주의로 빠져드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모든 성직자들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사제복을 입으면 하대어(下待語)가 시작된다. 나이가 많은 신자들에게도 거의 반대어(半待語) 수준이다. “그렇습니다” 대신에 “그렇지”로 나간다. 신자들도 신부(神父)는 영적인 아버지인 만큼 당연히 그러려니 받아들인다. 신자들에게도 문제가 없는 건 아니다. 사제들을 따뜻이 바라보는 시선도 좋지만 사제의 모난 행동에는 신자들에게도 일말의 책임이 있다.

몇 해전 서울대교구 박동호 신부가 쓴 글이 생각난다. 신학생 시절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이야기가 본당에 가면 절대로 신자들에게 반말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한다. 당연한 말을 교수신부들이 그토록 강조한 것을 보면 사제들이 신자들에게 얼마나 반말을 쉽게 해왔는지를 생각하게 됐다는 자성의 목소리였다. 사제들이 신자들로부터 존경받는 것은 사제복이 아니라 사제의 순명과 정결, 청빈의 삶을 보기 때문이다. 봉건시대의 영주처럼 본당을 사목하던 시대는 지났다.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한지 6년이 됐건만 여전히 존경을 받고 있는 것은 내려놓은 모습이다. 김 추기경에게서는 권위가 있었지만 권위주의를 볼 수 없었다. 항상 양 냄새가 나는 목자처럼 고통받고 억압받고 춥고 배고픈 이들과 함께 했다. 약자들의 성소(聖所)로 여겨졌던 명동성당은 예전의 ‘명성’을 잃어가고 있다. 세상은 신자들과 같은 눈높이로 바라보고, 낮은 곳에서 앞장서서 봉사하는 사제를 기다리고 있다. 예수처럼.

 

김종배 상임 논설고문  jongbae10@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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