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서 소외당한 개인의 아픔.좌절을 노래하다
사회서 소외당한 개인의 아픔.좌절을 노래하다
  • 뉴제주일보
  • 승인 2018.03.15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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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 속의 검은 잎(1989년)
입 속의 검은 잎(문학과지성사,2002)

[제주일보] 역사가 좋아 학창시절을 함께 한 친구들이기에 지금도 종종 답사여행을 떠나곤 한다. 지난해 어느 봄 날도 그렇게 모여 경기도 안성 일대의 문학기행을 할 기회가 있었다. 우리가 늘 찾아가는 역사유적지를 벗어나 분위기 한 번 바꿔보자는 한 친구의 제안이었다.

박두진, 조병화 등 대부분 안성 출신 작가의 고택이나 기념관 등을 찾아가는 일정이었지만, 천주교 추모공원에서 뜻밖의 인물과 만날 수 있었다. 1980년대를 대표하는 요절한 천재시인 기형도(奇亨度 1960~89)였다.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안개’ 당선으로 등단한 그는 29세의 젊은 나이에 1989년 3월 7일 새벽 종로의 한 심야극장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그의 시에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이라는 이름을 붙여준 문학평론가 김현의 시평이 수록된 그의 첫 시집이자 유고 시집인 ‘입 속의 검은 잎’(문학과지성사,1989)은 출간되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에 대해 요절한 시인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 때문이라거나 그의 죽음을 맞이한 장소 등에 관한 여러 가지 설(說)에 그저 잠깐 반짝했다가 사라질 거라고 평가절하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러한 평가는 민주화운동의 영향으로 부조리한 현실과 권력에 대한 저항이 주류를 이루었던 1980년대에 사회에서 소외당한 개인의 아픔과 좌절을 노래한 그의 시가 당시 문학계의 흐름과 결이 달랐던 이유도 있었다.

조금은 난해하고 어둡고 우울한 그의 시가 대중적인 인기를 얻을 수 없을 거라는 평가는 어찌보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의 시를 읽다보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그 시대의 어두웠던 사회상 속의 나약하고 소극적인 ‘내 자신’을 발견하기는 어렵지 않다. 같은 8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던 필자도 ‘나는 플라톤을 읽었다, 그때마다 총성이 울렸다’(대학 시절, 22쪽) 라는 구절에서 시인과 같은 소극적이었던 나의 삶을 되돌아 보게 된다.

기형도산문집(도서출판-살림,2002)과-기형도전집(문학과지성사,1999)

출판사에 문의해 본 바에 따르면 시집 출판 당시 평가절하했던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입 속의 검은 잎’은 지금까지 약 30만 부, 1999년 발간된 ‘기형도전집’도 지금까지 약 7만 부가 판매되었고 여전히 독자들에게 사랑받는 스테디셀러이다.

그의 시는 지금 다양한 방면에서 창작의 모티브로 살아 숨쉬고 있다. 영화로는 박찬옥 감독의 ‘질투는 나의 힘’(2002), 소설로는 작가 신경숙의 ‘빈집’, 가요계에서는 가수 심수봉의 ‘시월’ 등을 들 수 있는데, 요즘 우리나라 엑스레이(X-ray) 아트의 창시자로 각광받고 있는 정태섭 교수(연세대 의대)도 그 창작의 출발점은 기형도의 ‘입 속의 검은 잎’이었다.

안성천주교추모공원에 있는 기형도 시인의 묘지

지난해 11월 그가 살았던 광명시 소하동에 그를 기념하는 기형도문학관이 개관했으니, 관심있는 분들은 참관해 보시기 바란다. 또한 기형도의 문학 연구로는 처음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지금은 문학관에서 팀장으로 있는 김은석(필명 금은돌)님의 ‘거울 밖으로 나온 기형도’(2013, 국학자료원)도 일독하시기 바란다.

내년 3월이면 기형도 시인이 우리 곁을 떠난 지 꼭 30주년이 된다. 그 즈음 우리 제주에서도 그의 시를 사랑하는 이들이 함께 모여 조촐한 기념모임이라도 가지면 어떨까 싶다. 가능하다면 그의 시에서 탄생한 엑스레이 아트 작품과 함께....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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