굽이굽이 무수천 벗 삼아 걷다 보면 ‘근심이 사라져’
굽이굽이 무수천 벗 삼아 걷다 보면 ‘근심이 사라져’
  • 뉴제주일보
  • 승인 2018.02.05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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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제17코스(광령~제주원도심올레)-광령1리사무소~월대(5.3㎞)
양쪽에 벚나무 가로수가 우거진 광령1리 입구

[제주일보] # 애월읍 광령1리

광령1리 사무소 앞에 있는 17코스 표지석을 보니, 무수천을 따라 외도동을 거쳐 해안길로 가다 용두암에서 중앙로까지 이르는 긴 여정이다. 출발에 앞서 옆에 세워놓은 ‘광령1리 설촌 유래’를 읽어본다.

‘고려 중엽(서기 1100년 경)에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 너븐절의 지석묘 15여 기가 산재해 있는 것으로 보아, 씨족생활에서 부족생활로 전환할 무렵 마을 북쪽에 집단 거주하던 유목민들이 베여못을 거쳐 남죽동을 거쳐 올라와 마을을 형성한 것으로 추정’하며, ‘광령(光令)’이란 이름은 1653년(효종 4년)에 편찬한 이원진의 ‘탐라지’에 ‘산이 아름답고 물이 맑다’하여 ‘광(光)’이요, 주민이 밝고 선량하다 하여 ‘령(令)’이라고 설촌 당시부터 쓰였다고 한다.

아무려나 좋은 이름이라 생각하며 발걸음을 떼어놓는데, 가로수로 심어진 커다란 벚나무들이 눈에 들어온다. 제주에는 이렇게 오래된 벚나무들이 길게 심어진 곳이 드문데, 몇 년 전 벚꽃축제에 왔던 기억이 난다. 유난히 추운 겨울이어서 아직 꽃눈은 헤아리기 힘들다.

 

무수천계곡.

# 무수천 8경을 떠올리며

얼마 안 걸어 광령교에 이르렀다. 아무래도 광령은 무수천이 있어 빛나는 마을이다. ‘무수천(無愁川)’은 ‘근심이 사라진다’는 뜻으로 광령천을 달리 이르는 말이지만, 앞서 말한 ‘탐라지’에 기록될 만큼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거기엔 ‘제주시 서남쪽 18리에 위치하며, 제주에서 제일 큰 내로 냇가 양쪽 석벽이 기험(奇險)하여 경치 좋은 곳이 많다’고 했다.

앞으로 내리는 길은 굽이굽이 무수천을 따라 걷는 길이지만 가까워지기도 하고 멀어지기도 하면서 나그네와 벗이 될 것이다. 일찍이 향리 출신의 거유 김영호(金榮浩, 1912~1937)는 무수천의 아름다운 골짜기를 찾아 8경을 노래했다. 다리 아래 쪽으로 보이는 깊은 못은 그 네 번째인 ‘영구연(瀛邱淵)’으로 ‘들렁귀소’라고도 하는데, ‘들렁귀 바로 내리는 폭포가 여름 맑은 하늘에 눈처럼 얼린다(瀛淵飛瀑直流下 夏日晴天作雪凍)’고 노래했다.

 

도기념물 2호 광령지석묘.

# 광령지석묘와 외도지석묘

광령천은 저 멀리 한라산 삼각봉과 윗세오름에서 발원해 와이계곡에서 합수하고, 어리목 주변에서 다시 사제비동산과 쳇망오름 사이에서 발원한 내와 합쳐진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 물은 천아수원지에 이르러 살핀오름 주변에서 발원해 붉은오름을 돌아온 지류와 합쳐진다. 그래서 비가 많이 올 때는 엄청난 힘을 발휘해 땅속으로 파고들어 깊숙한 내를 이뤘다.

이 내는 광령에서 외도로 흘러 바위틈과 웅덩이에 머물며 웬만한 가뭄에도 그치지 않아 주변엔 일찍부터 사람이 모여 살기 시작했다.

창오교를 지나면서 올레길이 내 오른편에서 왼편으로 바뀐다. 잠시 올레길을 벗어나 농로로 들어가면 광령리와 외도동 곳곳에 지석묘가 널려있다.

지석묘는 우리가 흔히 ‘고인돌’이라 부르는 선사유적으로 제주에 남아 있는 것들은 원삼국시대 것들로 추정되는데 중심연대는 1세기부터 3세기로 본다. 그 중 외도동의 5기, 광령리의 6기가 도 기념물 제2호로 지정된 전체 26기 중 거의 절반을 차지한다. 이들 지석묘의 연대는 용담동 2호와 예례동의 것을 발굴 조사한 결과, 하부에서 출토된 곽지1식 토기를 통해서 추정한 것인데, 아직도 수수께끼가 완전히 풀린 것은 아니다.

 

# 외도 수정사지

길 따라 하천과 만나는 곳에서 외도축구장, 이어 외도실내수영장 옆을 지나다 보니, 추위에 웅크린 철새 떼들이 바위와 풀을 의지해 졸고 있다. 철책 때문에 사진도 못 찍고 지나는데, 바로 고망물이 나타난다. 들어가 샘 옆의 비석을 살핀즉 ‘수정천 신축 기념비’다. 그러고 보니, 이곳이 원대 3대 사찰의 하나인 수정사가 자리했던 지역이다.

전에 답사했던 적이 있어 어린이공원 쪽으로 찾아가 수정사지 안내판과 마주했다. 태종실록에 전하는 고려 말~조선 초의 수정사는 비보사찰로 노비 130인을 거느리는 대사찰이었다. 지표조사와 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절터 규모는 남북 120~150m, 동서 50~60m 정도였다고 한다. 발굴 결과 출토된 유물은 명문기와와 막새, 송원대의 중국 청자와 백자, 11세기 순청자, 조선청자, 백자 등이 출토되어 지금까지 도내 사찰에서 나온 유물 중 가장 화려하다고 했다.

여러 가지 자료로 미뤄볼 때 수정사는 13세기 이전에 창건, 1300년대 원(元)에 의해 대대적인 중창이 이뤄졌으며, 조선시대 중종 16년(1521)에 재차 증수를 거쳐 숙종 20년(1694) 이전에 훼철된 것으로 나타난다. 부근에 ‘수정사’라는 조그만 가정집 형태의 절이 있는데, 마당에 수정사 유물로 보이는 주춧돌 같은 것이 10여 점 놓여있다.

 

월대 옆 굽은 소나무.

# 월대에 앉아 쉬며

마을 사람들은 ‘월대(月臺)’를 ‘신선이 하늘에서 내려와 숲 사이로 떠오른 달이 맑은 물가에 비춰 그림자를 드리운 장관을 즐기던 누대’라고 한다. 그래서 조선시대에 많은 가객들이 이곳을 찾아 풍류를 즐겼다. 오늘 따라 ‘月臺’라 새긴 표석의 ‘月’자가 기울어진 것이 한층 더 멋스럽게 느껴지고, 단 옆으로 길게 누운 노송이 운치를 더해준다.

지금 주변엔 ‘외도물길 20리’라는 길을 마련했는데, 이곳 월대천을 시작으로 내도동 알작지해변, 내도 보리밭길, 역암층, 어시천 산책로, 옛 수정사지, 마이못, 조부연대를 도는 코스다. 한 때 이곳에서 잡히는 은어가 유명해 많은 사람이 찾아와 주변에서 즐기기도 했는데, 요즘도 은어가 옛날처럼 제대로 잡히는지 물가를 바라보니, 멀리 물을 가둬놓은 끝에 한 청년이 막대기를 들고 하늬바람을 따라 파도에 밀려온 괭생이모자반을 뜯어내느라 바쁘다. <계속>

<김창집 본사 객원 大기자>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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