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의 보약
긍정의 보약
  • 뉴제주일보
  • 승인 2017.11.14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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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희. 시인

[제주일보] 고지혈증 진단을 받았다. 성인병은 남들 이야기려니, 운동을 게을리한 게 후회가 된다. 나이 앞에서는 별수 없구나 싶은 생각에 중년의 우울감이 가시질 않는다. 세상 무너지는 표정을 짓고 있는 나에게 약 처방을 내주며 말을 건넨다.

“보약보다 더 좋은 거니깐 꼬박꼬박 챙겨 드세요.”

귀가 일순간 커졌다. 보약보다 더 좋은 거라니, 약을 꼬박꼬박 챙겨 먹는 일은 솔직히 자신이 없다. 십여 년 전에 뇌동맥류 수술을 받고 완치된 후에 혈관에 좋다는 약이랑, 몸에 좋다는 건강음료를 챙겨 먹긴 했지만 언제나 그렇듯 유효기간이 아주 짧았다

꾸준히 먹을 자신이 없어 될 수 있으면 무언가를 먹는 건 사양하는 편이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서인지 보약보다 더 좋다는 말에 눈이 커지고 귀가 환히 열렸다.

뒤돌아 생각해보니 보약을 먹었던 기억이 없다. 아이 낳고 산후 몸조리로 부기 빼는 약 몇 첩 먹었던 기억 말고는,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 한 푼이라도 아껴야 했다. 늙기 전에 집 장만도 하고 아이들도 남부럽지 않게 키워야 했던 우리 세대다.

열심히 살았는데 고지혈증 진단을 받고 우울해 있는 환자를 보기가 안쓰러웠는지 보약보다 좋다고 거듭 강조한다. 의사 선생님의 말을 듣는 순간 우울은 일순에 확 날아갔다. 꼬박꼬박 약을 챙겨 먹으라는 말은 어느 의사나 할 수 있지만 똑같은 말에다 따스한 온도를 입혀 친절한 미소까지 덤으로 얹어 주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보약이 되는 말이 있음을 깨닫고 나를 돌아보게 된다. 그동안 나와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상대방에게 상처가 되는 말을 했던 게 생각 나 부끄러워 가을 햇살에 고개를 숙인다. 긍정의 말을 하도록 노력해야겠다. 병원 현관문을 나서며 하늘을 쳐다보니 구름이 맑고 곱다. 며칠 전까지는 보이지 않던 하늘이다.

장석주 시인은 대추 한 알에도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고 했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지나간 후에야 대추 한 알이 된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대추 한 알에도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고 했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날이 깃들어야만 한다고 했다.

고지혈증 진단에 우울했던 마음은 '여우와 신포도'의 여우처럼 빨리 체념하기로 했다. 매일 보약 챙겨 먹는 것도 잊지 말고 오늘부터 운동도 꾸준히 해야겠다. 시골집 담벼락에 모든 걸 내려놓고 무연히 흔들리고 있을 대추나무 한 그루 떠올린다.

바람에 살랑이듯 자주 만나는 지인에게도 언제나 용기 잃지 말라고 건네는 말에 따스함을 넣어야지. 미루지 말고 지금, 내일은 너무 늦다.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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