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100년, 그 역사를 향해 쉼 없이 나아갑니다
창간 100년, 그 역사를 향해 쉼 없이 나아갑니다
  • 신정익 기자
  • 승인 2017.09.29 11: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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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민과 함께한 제주일보 72년
<그래픽=이현충 기자 lhc@jejuilbo.net>

[제주일보=신정익 기자] 제주일보는 1945년 대한민국 광복과 함께 창간돼 조선일보, 동아일보에 이어 대한민국에서 세 번째 연륜을 이어가고 있다.

격랑의 제주역사를 기록하면서 사회적 약자를 보듬고 늘 도민과 독자의 편에 서서 불편부당(不偏不黨)의 자세를 견지하는 언론 본연의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이는 72년의 짧지 않은 역사 속에서 부침의 순간들도 있었지만, 대(代)를 이어 제주일보를 사랑하는 도민과 독자들의 성원에 보답하기 위해서다.

창간 72주년을 맞아 제주일보가 걸어온 길을 다시 짚어보는 것은 창간 100년을 향한 또 다른 다짐이다.

 

# 열혈 20대 청년들 제주신보 창간 주도

제주일보의 출발인 제주신보(濟州新報)는 해방공간에서 새로운 조국 건설에 일조한다는 청년들의 열정의 결과물이었다.

미군이 제주에 상륙한 후 사흘만인 1945년 10월 1일 마침내 제주역사상 최초의 한글 신문인 제주신보가 창간됐다. 당시 일본군이 발행하던 제주신보가 있어서 창간 후 4개월 가까이는 제주민보(濟州民報)라는 제호를 사용했다.

창간 멤버는 20대 열혈청년인 김용수‧이기형‧문종욱‧고광태‧박광훈‧박대전 등이었다. 발행인 등 경영체제는 갖추지 못했지만 신문발행에 대한 열정만은 대단했다. 이들은 관덕정 남쪽, 당시 제주읍사무소 앞 골목에 있던 강성언이 경영하던 강본인쇄소에서 신문을 인쇄했다.

한글 활자가 없어서 일제 말기 한글 말살정책에 따라 일본이 땅속에 묻어 폐기했던 한글활자를 하나씩 파내어 씻은 후 창간호를 300부 가량 발행했다. 창간호에는 미군 진주와 미국 사령관 파웰 대령과의 인터뷰, 일본군의 무장해제와 철수 일자 등의 소식이 실렸다. 관덕정 광장에 선 오일시장에서 창간호를 받아 본 도민들은 해방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거듭 확인하고 신문창간을 크게 환영했다.

제주민보는 1946년 1월 26일 미군정 공보처에 등록을 하면서 제호를 제주신보로 바꿨지만 자금난과 용지난까지 겹쳐 상당한 어려움에 직면했다. 이런 가운데 1947년 1월 1일 황순하‧윤성종‧백찬석‧홍종언‧김석호‧박영훈‧신두방 등 도내 유지 7명이 중심이 돼 제주신보사를 법인조직으로 재탄생시켰다. 그리고 며칠 후 남녀기자를 공개모집하면서 본격적인 취재진용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 창간 72년 제주언론 발전 선도

1948년 제주현대사의 최대 비극인 4‧3사건이 발생하면서 제주신보도 호된 시련을 겪는다. 이 해 8월 2대 편집국장인 김호진이 산사람쪽의 포고문과 담화문을 인쇄해줬다는 혐의로 군부에 의해 처형됐다.

설상가상으로 서북청년단은 같은 해 12월 하순 제주신보를 강제로 접수한 후 왜곡보도를 일삼아 도민들로부터 외면을 당하기도 했다.

서청에 넘어갔던 제주신보의 경영권은 1949년 10월 12일 계엄령이 해제된 후 1950년 3월쯤 사주인 김석호에게 돌아왔다. 그렇지만 서청이 신문사를 장악했던 1년 동안 각종 서류를 비롯해 창간호 등 발행했던 신문 모두를 잃어버려 제주언론사는 공백기로 남게 됐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고 이듬해 1‧4후퇴로 다시 계엄령이 선포된 후 제주지역계엄사령부가 제주신보를 접수하는 등 시련이 이어졌지만 언론에 대한 강한 의지로 이를 극복하고 정상화의 길로 빠르게 들어선다. 제주신보는 1955년 10월 1일 창간 10주년을 맞아 ‘불편부당’, ‘정의인도’, ‘진실보도’ 등의 사시(社是)를 발표했다. 이듬해 창간 11주년에는 편집강령도 공표했다.

5‧16군사쿠데타가 발발하는 등 한국현대사의 격동기에 접어든 1960~1970년에는 제주신보와 후발 일간지인 제민일보가 통합해 제주신문으로 제호를 변경, 제주의 대표 언론으로서의 역할에 본격 나섰다.

1980년대 말 민주화의 열풍 속에 제주신문도 발행이 중단되는 등 큰 아픔을 겪었지만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국내 신문사 가운데 처음으로 최첨단 컴퓨터 신문제작시스템(CTS)을 도입하면서 위기를 기회로 전환시켰다. 이후 혁신적인 지면 개편과 최첨단 고속윤전기 추가 도입을 통한 신문 제작 공정의 완전자동화를 이루면서 최고전통에 걸맞은 최고 시설과 최고 지면을 제작하는 신문사로 국내 언론계에 각인된다.

1996년 11월 1일부터 제호를 한글 ‘제주일보’로 전격 바꾸고 전면 가로쓰기 편집으로 전환해 대한민국 신문 역사에 남을 혁신을 주도했다.

제주일보는 대한민국 현대사에 있어 최대 위기 중 하나였던 외환위기(IMF)가 닥치면서 경영난이 가중되고 사옥매각과 이전, 부도 등의 아픔을 겪었지만 제주 최고의 연륜과 자긍심을 바탕으로 다시 일어서 제주 대표 언론의 길을 의연하게 지키고 있다.

# 도민과 함께 제주 발전에 기여

제주일보는 창간 이후 72년 동안 도민들과 희로애락을 함께 하면서 다양한 분야의 사업을 통해 지역사회 발전에 견인차 역할도 수행했다.

6‧25전쟁이 종전으로 치닫던 1953년 2월 제주일보는 식량부족으로 어려움을 겪는 도민들을 위해 의연금품 모집 운동을 전개했다.

청소년들의 체력 증진과 축구에 대한 꿈을 실현시켜 주기 위해 전도 중‧고교축구대회도 이때부터 개최됐다. 이후 어린이면 제작과 연재소설 게재, 학술기획물 장기 연재 등을 통해 전국 대표언론들과 어깨를 겨루며 명실공히 전통지에 걸맞은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제주일보는 특히 제주지역 학생축구를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 백호기쟁탈 전도 초‧중‧고 대항 축구대회를 창설한 것을 비롯해 ‘3월 학생문예’, 모자사생대회, 도일주역전마라톤대회 등을 잇따라 개최했다. 이와 함께 제주바둑왕위전, 제주보훈대상, 제주도4-H대상, 제주일보배 대상경주 등을 통해 도민들의 다양한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키면서 사회적 공기(公器)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다.

2000년대 들어서도 제주학생토론왕 선발대회와 제주일보기 배드민턴대회, 제주-중국 청소년축구교류전 등을 마련해 도내 스포츠 활성화와 청소년들의 꿈을 키워주는데 앞장섰다.

제주일보는 창간 28주년을 맞은 1973년 제주시 북신로에 새 사옥을 준공하고 사시를 ‘정론직필(正論直筆), 민권수호(民權守護), 성실봉사(誠實奉仕)’로 새로 정했다.

언론 본연의 사명인 정론에 충실하면서 도민들의 권익을 지키는데 최선을 다하겠다는 스스로의 다짐이자 도민들과의 약속이었다.

제주일보는 공정한 보도를 바탕으로 시시비비와 옥석을 가리는 냉철한 진단과 분석, 사회적 약자를 위한 배려의 문화를 정착시키겠다는 다짐을 올곧게 실천하면서 창간 100년을 향해 뚜벅뚜벅 가고 있다.

 

신정익 기자  chejugod@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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