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라이와 광주, 그리고 제주
미라이와 광주, 그리고 제주
  • 신정익 기자
  • 승인 2017.08.31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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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일보=신정익 기자] ▲“옴팡밭에 가보니 동네사람들이 흘린 피로 흙이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 그 때 북촌 하늘은 빨간 불바다였다”

2016년 3월 30일 제주4‧3 68주년을 앞두고 제주문예회관에서 4‧3증언 열다섯 번째 증언본풀이에서 나온 절규다.

그 유명한 북촌리 대학살의 현장을 생생하게 목격한 피해자 고완순 할머니가 가족과 이웃들이 어떻게 군인들에게 죽임을 당했는지를 어제의 일처럼 쏟아냈다.

1949년 1월 17일 대학살이 벌어진 날 고 할머니는 11살 소녀였다. 그 완순이는 북촌국민학교로 모이라는 군인들이 명령에 아무생각 없이 따라갔다가 수백명의 이웃 삼촌들이 낙엽처럼 스러지는 몰살의 현장을 생생하게 봤다.

제주4‧3 당시 ‘피의 광풍(狂風)’은 제주섬을 휘감아 돌며 동족의 가슴에 탄환을 박는 살육의 역사를 남겼다.

당시 정부의 경무부장은 “제주도를 다 태워 없애라”며 공권력에 의한 양민학살을 공개적으로 명령했다. 물론 미국의 묵인과 동조가 있어서 가능했다.

국민과 영토를 지켜야 할 대한민국 군인과 경찰이 적의 심장을 겨누듯 국민들을 학살한 역사가 이렇게 진행됐다.

▲베트남전이 한창이던 1968년 3월 16일 베트남 중부에 있는 미라이(My Lai)마을에 광란의 피의 축제가 펼쳐졌다.

미군들이 마을을 휘저으며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보이는 대로 난사해 최소 400명 이상이 처참하게 살해됐다.

영어를 할 줄 몰라 몸짓과 손짓으로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마을 주민들을 미군들은 잔혹하게 사살했다고 한다.

이틀 전 부비트랩 공격을 받아 미군의 사상자가 발생한 데 대한 앙갚음이었다. 살육을 피해 달아나는 주민들에게 총격을 가하고 집에 수류탄을 던졌다.

‘미라이 대학살’은 1년 후 미국의 군법회의에서 다뤄졌지만 처벌을 받은 군인은 단 한명. 그것도 가택연금 3년이었다. 천인공노할 양민학살에 대한 죗값치고는 너무 가벼웠다.

훗날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핏빛으로 물들이며 질곡 속으로 몰고 간 한줌도 안 되는 정치군인들도 베트남에서 학살의 명분과 방법을 배웠으리라.

▲요즘 국내 한 언론사가 입수해 보도한 미국 국방정보국(DIA)의 첩보보고서가 충격을 주고 있다.

1980년 5‧18광주민주화운동을 무자비하게 진압한 신군부 주도세력들이 광주시민들을 베트남전에서 베트콩을 토벌하듯 학살했다는 증거들이 여기저기서 확인됐기 때문이다.

이 문서에서 미국 정보관계자들은 전두환을 비롯해 노태우, 정호용 등 당시 신군부의 수뇌부들이 베트남전 참전 경험을 바탕으로 공수부대를 동원해 광주시민들을 잔인하게 진압했다는 것이다.

전두환 등은 베트남에서처럼 공산세력이 시민들을 선동해 광주사태를 일으켰다는 날조된 논리를 내세워 민주화를 요구하는 선량한 광주시민들을 향해 무차별 총격을 가했다는 얘기다.

전두환은 제1공수 부단장을 거쳐 1970년 백마부대 연대장으로 월남전에 참전해 실전경험을 쌓고 돌아와 제1공수특전단장을 지낸 후 보안사령관에 오르며 승승장구했다.

그런 그의 베트남에서의 경험들이 광주에서 한편의 전쟁영화처럼 화려하게(?) 다시 재현됐던 것이다.

5‧18당시 UH-1H 핼기가 광주 전일빌딩을 비롯해 광주시내 곳곳에 M60기관총을 난사한 것 역시 베트남전에서 배운 솜씨였다는 것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일제와 미 군정기를 거쳐 군사독재의 암흑기를 지나온 대한민국의 역사에는 늘 양민학살의 핏빛 그림자가 자리하고 있다.

그런데도 제대로 된 단죄(斷罪)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그런 학살의 DNA를 계승한 것을 자랑으로 삼는 이들이 여전히 역사를 두려워하지 않고 설친다.

진상을 밝히고 책임을 물어야 할 부끄러운 역사는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반드시 청산하고 넘어가야 한다.

신정익 기자  chejugod@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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