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오니소스적인
디오니소스적인
  • 뉴제주일보
  • 승인 2017.08.29 1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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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신. 하귀일초등학교장 / 수필가

[제주일보] 니체는 모든 예술을 아폴론적 예술과 디오니소스적 예술로 나누어 불렀다. 건축, 조각, 회화처럼 형태가 있는 조형예술은 이성(理性)과 지성(知性)을 담당하는 아폴론의 이름을 붙여 아폴론적 예술이라 했다. 반면 음악, 춤 등의 무형예술은 야성과 충동과 광기를 가진 디오니소스의 이름을 붙여 디오니소스적 예술이라고 불렀다. 디오니소스적 예술은 도취의 예술로 그 에너지는 야성, 충동, 광기다.

‘그럼 문학은 어디에 속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아폴론적에 더 가깝지 않을까. 한편의 문학 작품을 탄생시키기까지 이성과 지성을 동원해야함은 물론 오랜 시간 작품과 씨름하는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한 개인 안에도 아폴론적 에너지와 디오니소스적 에너지가 존재한다. 어느 쪽을 더 많이 사용하느냐 차이일 뿐이다. 이성과 지성을 추구하는 삶도 있고 ‘지금–여기’에서의 삶을 야성으로 살아내는 사람도 있다. 나의 삶은 극히 아폴론적 삶이다. 그래서 나의 글 역시 이성과 지식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얼마 전에 니코스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으면서 조르바에게 점점 빠져드는 경험을 했다. 그의 삶의 방식은 극히 디오니소스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삶은 나의 깊숙한 곳에 숨겨진 야성과 본능을 툭툭 걷어찼다.

두 주인공(이야기하는 사람, 조르바)을 비교해 본다. 둘은 크레타 섬으로 가는 배에서 우연히 만나서 함께 일을 하게 된다. 두 사람은 인생관이 극명히 달랐다. 화자는 탄광을 물려받은 자본가고 이성과 지식을 추구하는 책벌레며 도덕적 보편주의자다.

반면 조르바는 가진 것 없는 빈털털이요, 자유주의자다. 조르바는 그야말로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쟁에 참여해서 살인도 해봤고, 결혼도 했지만 가정을 지키지 못했고, 어린 아들이 죽고, 부인도 없으며 직업도 일정하지 않은 떠돌이 같은 인생이다. 보편적 시각에서 보면 조르바는 제멋대로 사는 못 말리는 인간이다. 그런 조르바를 화자는 ‘마음은 열려 있고, 가슴은 원시적인 배짱으로 고스란히 부풀어 있는 사람이다’라고 말한다. 화자 역시 이성으로 무장된 자신의 울타리를 조금씩 허물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조르바는 육체와 영혼은 늘 함께 가야 한다고 여긴다. ‘육체를 먹이지 않으면 어느 날 영혼을 길바닥에 내팽개칠지도 모른다’고 하면서 육체적 욕구도 중요시 한다. 영혼이 진정 자유로운 사람은 영혼의 소리에 따라 육체도 그렇게 움직인다. 적어도 조르바는 야성이 이끄는 대로, 때로는 광기에 도취된 자유로운 삶을 살았다. 영혼의 자유를 이성으로 가둬버리고 부와 명예를 쫓거나 신의 의지에 반하지 않으려고 구도자처럼 사는 사람들에게 조르바는 외친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라고 말이다.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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