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노을 트럼펫 소리
바다 노을 트럼펫 소리
  • 뉴제주일보
  • 승인 2017.08.22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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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훈식 제주어보전육성위원/시인

[제주일보] 2017년 여름이 간다. 영영 간다. 바닷가에 노을이 지면 구성진 트럼펫 소리가 들린다. 넘실거리는 바다 물결 위로 석양이 깨진 노른자처럼 수평선에 닿으면 물이 끓는 소리가 난다고 했던가. 붉은 장막이 바닷가에 둘러 쳐지고 물새들이 자맥질하는 해녀들처럼 수면을 넘나들면 온통 붉은 무대가 펼쳐지는데 석양은 구름을 태우는 모닥불이 된다. 자연의 향연에 신이 난 나는 붉은 구름을 바라보면서 그만 눈물을 질금거린다.

고향 바다 탑하동. 잠시 눈을 감아도 생생하게 떠오르는 유년의 바다. 노을빛이 내 얼굴에 금박을 입히는 줄 알면서도 그 시절로 사색의 발걸음을 옮긴다.

억새꽃이 핀 언덕에서 바다를 내려다 보면 돌고래 떼가 첨벙이며 지나가는 그런 별천지가 제주도다. 소년기를 다른 생명체와 더불어 살았다. 초가지붕엔 참새들이, 처마엔 제비들이, 마당엔 개와 고양이, 병아리를 돌보는 어미 닭들이, 숨어 우는 맹꽁이가, 돌담 아래 핀 채송화를 슬그머니 따먹는 엄지털붉은게가 돌 틈으로 환히 보인다.

더러 찌그러졌지만 소중한 주전자를 들고 바릇잡이하러 바닷가로 나간다. 서둘러 올레를 나서자마자 족제비가 재빠르게 가로질러 도망간다.

풀이 조금 돋아있는 둔덕만 올라도 메뚜기 떼와 나비·말벌이 어지럽게 날아다니는가 하면 파도소리 사이로 매미소리도 들렸다. 방파제 근처에 가면 검은 바퀴벌레처럼 생긴 갯강구가 떼로 모여 다니다가 내가 나타나면 사방팔방으로 흩어진다.

돌밭에 가면 똥깅이라는 먹지 못하는 게들이 돌 틈으로 숨어들고, 비가 오면 떼로 나와서 밥이 익는 거품을 물고 있던 듬북깅이들이 삽시간에 눈앞에서 사라진다. 물가가 있는 돌무더기 얕은 물에 보들락이라고 하는 배도라치와 작은 물고기들이 헤엄치는 것도 보인다. 제주어로 보말이라고 하는 고동들이 이끼 돋은 돌에 달라붙어 해초를 뜯어먹고 있다. 먹돌을 뒤집어 소라도 따고, 제수가 좋으면 문어도 잡았다.

여름 내내 바닷가에서 노느라고 등에 물집이 여러 번 생겨도 신명이 났고 사춘기에서 청년이 돼서는 태우에 동승해 자리 뜨러 다녔고, 갈치도 낚으러 다녔다. 수영도 뽐낼 만큼 자신이 있어서 잠수해 작살로 고기도 많이 쏘았다.

피서한다고 달밤에 동네 처녀들과 청년들이 튜브에 나눠 타고 멀리 수영하러 나가기도 했다. 이러한 바다 추억이 내재돼 있었으니 수평선은 넘치거나 모자라지 아니하는 중용의 실천임을 깨달았다고는 하지만 어느 세월에 내가 70이 넘었느냐는 회한이 몰려온다.

젊음을 불사른 열정이 있었으니 노을 지는 물결이 당연하다. 그때처럼 달빛에 반딧불이가 난다 한들 유언이나마 전할 수 있는 엄숙한 바다 풍경이기에 마냥 아쉽지는 않다.

다시 트럼펫 소리를 들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으랴. 이미 수평선 위로 공연이 끝났다는 암시로 별들이 뜨고 어화를 켠 배들은 저마다 물결에 흔들린다. 내가 없어도 이 바닷가엔 노을이 붉은 마차처럼 다시 올 것이고, 누군가가 환청으로 듣는 트럼펫 소리는 오래 감미로울 것이다. 그 트럼펫 소리는 해녀들의 이어도를 찾는 노래와 같아서 여름 바다 위로 여울지고 구비치는 숨비소리였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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