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악산서 시작된 일제 만행의 흔적 알뜨르비행장 이르러 정점
송악산서 시작된 일제 만행의 흔적 알뜨르비행장 이르러 정점
  • 뉴제주일보
  • 승인 2017.08.14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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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제10코스(화순~모슬포올레)-해송길~모슬포항(5.9㎞)
알뜨르비행장에서 바라본 섯알오름과 산방산, 한라산

[제주일보] # 동알오름에서 셋알오름으로

올레 코스를 통해 송악산에서 내려와 해안로를 지나면, 바로 동알오름이다. ‘알오름’은 정확한 개념으로 존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본 오름 아래쪽이나 오름 사이, 또는 가운데에 자리한 조그만 오름을 지칭하는 말이다.

송악산 북쪽에 작은 산체가 셋 있는데, 동쪽이 동알오름, 가운데가 셋알오름, 서쪽이 섯알오름이다. 이 중 동알과 섯알오름은 오름 368개 속에 들어가지만 셋알오름은 안 들어간다.

답사 때마다 셋알오름을 거쳐 섯알오름으로 길을 안내하면서 ‘우리 제주민들은 이렇게 아름다운 땅에서 왜 그런 고난의 길을 걸어왔을까’하는 안타까움에 무슨 말부터 꺼낼지 몰라 머뭇거린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송악산에서부터 시작된 일제 만행의 자취는 셋알오름에서 그 실체를 드러내고 섯알오름을 거쳐 알뜨르비행장에서 정점을 찍는다.

셋알오름에는 둥그런 시멘트 구조물들이 있는데, 일제강점기에 구축해 놓은 고사포 진지다. 등록문화재 316호인 이 시설물은 당시 알뜨르비행장을 보호하기 위한 군사시설이었다. 1945년 무렵 축조된 고사포 진지는 모두 5기로 4기는 완성되고 나머지 하나는 미완공 상태다. 또 이 시설물 지하에는 총 길이 1220m의 거대한 진지동굴을 구축했는데, 지휘소와 통신소 등이 들어갈 예정이었지만 완성되지 않은 상태로 있다.

 

# 4·3 학살터와 추모비

셋알오름을 지나고 얼마 안 있어 나타나는 커다란 구덩이. 4․3 때 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한 알뜨르비행장 탄약고 터다. 이곳은 미군에 의해 폭파돼 당시까지 커다란 구덩이로 남아 있었는데, 1950년 8월 20일(음 7월 7일) 새벽 2시에 한림지서 관할 한림항 어업조합 창고에 수감됐던 예비검속자, 새벽 5시에는 모슬포 절간고구마 창고에 갇혀 있던 예비검속자들이 총살됐던 장소다.

‘예비검속’은 범죄 방지의 명목으로 범죄를 저지를 개연성이 있는 사람을 사전 구금하는 전근대적 제도다. 당시 제주에서는 인민위원회 간부, 3․1사건 관련자, 4․3사건에 관련돼 재판을 받았거나 수형 사실이 있는 사람들을 보도연맹에 가입시켜 관리했었다.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정부는 전국 각 지역 경찰서에서 관리하던 보도연맹원과 반정부혐의자들에 대한 예비검색을 행하고, 제주에서는 7월부터 8월 사이에 수차례 집단총살이 이뤄진다.

이곳에서 총살당한 사람들은 당시 시신 수습도 못하게 하다가, 1956년 3월 30일에야 한림지역 유족들이 시신 61구를 수습해 한림면 금악리 속칭 만벵디 공동장지에 안장했고 같은 해 5월에 모슬포지역 유족들이 청원해 132구의 시신을 거둬 대정면 상모리에 안장하고 ‘백조일손지지’라 명명했다. 추모비는 자세한 내용과 희생자 명단을 새겼다. 비석에 새긴 추모시를 본다.

 

‘트럭에 실려 가는 길/ 살아 다시 못 오네// 살붙이 피붙이 뼈붙이 고향마을은/ 돌아보면 볼수록 더 멀어지고/ 죽어 멸치젓 담듯 담가져/ 살아 다시 못 가네// 이정표 되어 길 따라 흩어진 고무신들/ 전설처럼 사연死緣 전하네// 오늘은 칠석날/ 갈라진 반도 물 막은 섬 귀퉁이 섯알오름// 하늘과 땅, 저승과 이승 다리 놓아/ 미리내 길 위로 산 자 죽은 자 만나네// 녹은 살 삭은 피 흩어진 뼈/ 온전히 새 숨결로 살아 다시 만나네’ -김경훈 ‘섯알오름 길’ 모두

 

# 알뜨르비행장에서

4·3추모비를 돌아보고 나오면 드넓은 평야지대, 이른바 ‘알뜨르비행장’이다. 이곳은 일제가 아시아 경영의 야욕으로 1926년에 계획해 1935년에 만든 비행장이다.

당시는 일제강점기여서 주민들을 내쫓고 징발한 주거지와 농지, 목장 등을 이용해 20만평으로 완공했고 태평양전쟁 준비를 위해 1937년부터 다시 확장을 거듭해 1945년에는 80만평으로 늘렸다.

제주는 규슈와 중국을 연결하는 징검다리와 같은 역할을 하고 필리핀으로 가는 길목에 있어 지정학적으로 삼국의 중심에 놓여 있다. 또 이곳은 중국과 가깝고 태평양에 인접해 있으며, 옆 화순 앞바다는 수심이 깊어 자연적인 항만이기 때문에 일본이 지목한 최적의 군사요충지였다. 그래서 중일전쟁 때에는 대륙 침략 전쟁의 전진기지로, 전쟁 말기에는 본토 방어를 위한 거점으로 이용했던 것이다.

지금 남아 있는 격납고는 등록문화재 제39호로 지정된 20개소다. 비교적 원형에 가깝게 남아 있는 격납고는 소형 비행기를 세우기 위한 시설이었는데, 소년들을 훈련시켜 폭탄을 실은 비행기에 태워 대륙으로 보냈다고 한다. 바로 가미가제 특공대다.

이렇게 많은 사연을 안고 문화재로 등록된 지하벙커를 비롯한 12군데의 일본군 전쟁유적지를 그대로 방치해서는 안 된다. 좋은 방안을 모색해 여러 용도로 활용했으면 좋겠다.

 

# 모슬포항으로 가면서

넓은 벌판은 가뭄으로 농작물이 힘겹다. 감자 수확이 끝나 벌겋게 바닥을 드러낸 밭이 있는 반면, 고구마 줄기는 아직도 푸르다.

여기저기 그늘을 드리운 격납고가 무슨 괴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언제나 옆에 자리해온 가깝고도 먼 나라. 칼이 지배하던 나라는 자신들의 문제를 안에서 해결 못하면 밖을 향해 휘둘렀다. 대의명분은 뒷전이고 저항하는 자는 없애버리던 세상이었다. 해방 후 우리나라에도 그걸 답습하는 위정자들이 판치는 세상도 있었다.

요즘 강제징용을 다룬 ‘군함도’라는 영화가 화제가 되고 있어, 뜻있는 인사 중에는 이곳 알뜨르비행장 주변을 평화 상징 박물관으로 만들자는 주장이 있다. 대통령이 후보 시절 ‘알뜨르비행장 제주에 무상양여’라는 추가 공약도 있다면서…. 그러나 뜻만 가지고는 이뤄지는 일은 없는 법. 그러다 보니 벌써 모슬포항이다. <계속>

<김창집 본사 객원 大기자>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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