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제주 상권의 핵심, 종합무역상사의 효시
일제강점기 제주 상권의 핵심, 종합무역상사의 효시
  • 고현영 기자
  • 승인 2017.08.08 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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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실상점 1910년 개점 후 급성장 도내 무역 주도…사회적기업 역할도 충실
1910년 현재의 KEB 하나은행 자리(제주시 중앙로 사거리)에 개점한 ‘박종실 상점’ 모습

[제주일보=고현영 기자] 1885년 따스한 5월, 제주 푸른 바다의 정기를 가슴에 품은 한 소년이 태어났다. 소년은 5살이 되던 해 아버지를 따라 큰아버지가 살고 계신 전라북도 부안으로 떠났다.

1896년, 가족과 함께 귀향한 소년은 사업차 타지로 기약 없이 떠나 버린 아버지를 대신해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소년의 나이 12살이었다.

가장이 된 소년의 어머니는 낮에는 돌밭을 메고 저녁에는 삯바느질을 하며 가정을 꾸렸다. 어머니를 도울 길이 행상 밖에 없었던 어린 소년은 이 마을 저 마을 골목골목을 누비며 실과 바늘·성냥 등을 팔기 시작했다.

자산이라고는 근면과 신용이 전부였던 소년은 오로지 자신과 가족만을 생각하며 수식어처럼 따라다니는 ‘가난’의 꼬리표를 떼어 내기 위해 수년을 버티고 또 버텼다.

제주를 찾아온 외국인 등 손님들과 삼성혈에서 찍은 기념사진(오른쪽). 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청암 박종실.<청암선생 추모회 제공>

그러던 중 소년은 현재의 성내교회(제주시 삼도2동) 근처에 소위 구멍가게를 차리기에 이르렀고 18세가 되던 해인 1903년 제주시 칠성로에서 소매상을 시작할 수 있게 됐다. 이 소매상이 ‘박종실 상점’의 시초라 할 수 있다.

오로지 가진 것이라고는 성실함이 전부였던 그 소년은 바로 일제강점기의 사업가이자 제주의 거상, 박종실이다.

그가 운영하던 소매상은 ‘박종실 상점’으로 개점했고 1910년 현재의 KEB 하나은행 자리(제주시 중앙로 사거리)로 옮겨 역사적 출범을 했다. ‘한일합병’이라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흔들리는 조선의 국체를 굳건히 하기 위해 그가 선택할 수 있었던 애국은 바로 ‘무역’ 이었다.

당시 제주로 이주해 온 다수의 일본인들은 칠성로를 중심으로 양품점·식당·식료품점 등을 운영하며 제주 상권을 독점했다.

김구 선생 추도식을 마치고 찍은 기념사진. 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청암 박종실. <청암선생 추모회 제공>

특히 일본인이 경영했던 ‘반상점’(伴商店, 제주시 칠성로 위치)은 잡화점이었지만 해운업·인쇄업·목재상 등을 두루 겸하며 상권의 중심에 자리했다.

이러한 악재 속에서도 박종실은 도내 기업인으로서 일본과의 교역에 역점을 두며 상권을 이끌었다. 도내 물품은 일본으로 보내고 또 일본의 물자는 제주로 들여오는 소위 수출입 무역거래를 주도했다. 식료품과 비단·솜·철물류 등으로 무역을 시작한 그는 직접 일본의 큐슈, 오사카 지역의 상점들과 특약을 체결하며 교류의 물꼬를 넓혔다.

이후 그는 ‘박종실 상점’을 구심점으로 사업 활동 영역도 확대시켜 나갔다. 해운업을 비롯해 운수업, 석유배급에 이르기까지 도내에서 그의 손이 닿지 않는 거래는 없을 정도였다. 그가 직접 설립한 법인은 제주상선주식회사(1922년), 제주상사주식회사(1935년), 제주통운주식회사 등이다. 특히 제주상선주식회사인 경우 순수한 제주 자본만으로 설립된 최초의 해운회사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1931년 발간된 ‘조선실업신용대감’에 따르면 ‘박종실 상점’의 연간 매출액은 4만3000원(40억원 상당의 가치)이었다. 도내 상설 점포 중 연간 판매액 순위에서 단연 1위를 놓치지 않은 것만 봐도 당시 제주 상권의 핵심이었음을 알 수 있다. 1935년 5월에는 제주상공회를 설립, 초대 회장직을 맡기도 했다. 행상을 시작한 지 30여 년 만에 그는 굴지의 도내 기업인으로 확고한 영역을 표시한 것이다.

교육에도 남다른 열정을 갖고 있던 그는 자비로 1957년 6월 제주도서관을 건립해 제주도에 기증했다. 열정은 있지만 기회가 없었던 젊은이들에게 배움의 길을 열어주기 위해서였다.

1965년 11월에는 의지할 곳 없는 노인들을 위해 경로당을 지어 제주시에 기증하기도 했다.

1966년 6월 13일 82세를 일기로 고요히 눈을 감은 청암(晴巖) 박종실. 제주신보(현재 제주일보)는 1966년 6월 19일자 지면에서 ‘고(故) 박종실옹 장례식은 18일 상오 관덕정앞 광장에서 제주도 초유의 사회장으로 엄수되었다. 200개에 가까운 화환과 식장을 메운 만장 등 전례 없이 성대한 장례식에는 1000여명의 시민과 학생들이 참배하였으며 오가는 행인의 발을 멈추게 하였다’라고 기록했다.

그가 오래도록 회자되는 이유는 제주 출신 거상이기도 했지만 제주도, 나아가 국가의 안위와 미래를 걱정하는 ‘사회적 기업인’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했기 때문이 아닐까.

청암 박종실

“이익(利益)은 혼자 차지하면 안되는 것이야. 고루 나누어 가져야 하지. 사업도 마찬가지 정신으로 해야 하는 것이지. 조금씩 남겨서 많이 팔아야 되지. 박리다매(薄利多賣)가 좋아.”

생전 박종실 선생의 어록 중 하나다.

지금은 대수롭지 않게 지나치고 있는 나눔과 봉사 그리고 공동체 의식이 당시 성내(城內)를 에워싼 분위기였으리라. 점점 웃음이, 사람소리가, 상권이 뒷걸음질치고 있는 원도심을 가까이서 만나봐야 하는 이유다.

 

고현영 기자  hy0622@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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