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사회의 敵(적)과 극단주의
열린 사회의 敵(적)과 극단주의
  • 부영주 주필·편집인/부사장
  • 승인 2017.07.30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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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일보=부영주 주필·편집인/부사장] 술자리가 무서워 제주도로 도망쳐 왔다는 대학 동창의 반농담같은 얘기는 씁쓸하다. 과음할까 두려워서가 아니라고 한다. 세상사를 놓고 술자리 토론이 벌어지면 동석자들 간에 의견이 극단으로 갈려 술자리 뒤끝이 영 좋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함께 휴가 온 정부 고위공무원 출신 인사가 들려준 여담 한토막은 더 적나라하다. 얼마 전 한 모임에서 탈(脫)원전 문제를 놓고 올바른 길이냐 아니냐를 놓고 격론이 벌어졌다고 한다. 참석자들은 전직 교수와 전 대기업 임원, 전·현직 공직자, 자영업자 등 다섯.

술자리 토론 중 “야, xx야. 네가 에너지를 알아?” 하는 말이 격화돼 육박전 일보 직전까지 갔다가 둘, 셋으로 나뉘어 인사도 없이 헤어졌다는 것이다. 다음날 전화로 안부를 묻고 웃기는 했다지만 그 감정이 사라지지 않은 듯 했다.

▲대한민국은 지금 극단주의자(extremist)들의 세상이다. 이들은 대부분 이념·계층·세대 등을 고리로 한 ‘진영(陣營)주의자’들이다. 나라와 지역사회 현안이 제기될 때마다 경력이나 지위, 학력에 관계없이 내편, 네편으로 쪼개지고 선악(善惡)·흑백(黑白) 구도로 양분된다.

음모론적 접근과 ‘인격 살인’도 난무한다. 사드(THAAD) 배치 문제에서부터 탈(脫)원전 문제, 검경(檢警) 수사권 조정문제, 최저임금 인상 문제, 증세(增稅)문제 등 그 평론은 늘 극과 극이다. 제주는 어떤가. 지역사회는 ‘개발이냐 보존이냐’ 하는 해묵은 의제가 극과 극으로 갈등한다.

칼 포퍼(1902~1994)의 오래된 책 ‘열린사회의 적(敵)’ 결정판을 보는 느낌이다. 자신의 의견만을 영원한 진리라고 보고, 다른 의견에 재물리려는 행태를 칼 포퍼는 ‘열린사회의 적’이라고 규정했다. 반세기 이전에 히틀러와 스탈린이라는 양극단의 전체주의를 경험한 그의 소회였다. 그런데 21세기 우리는 칼 포퍼를 되돌아보고 있다.

▲이를 두고 어떤 이는 “우리 특유의 파벌 DNA 때문”이라고 하고, 누구는 “좌우로 갈라졌던 4·3사건의 소산”이라고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우리 제주도에만 유독 극단주의자가 득세하는 걸까. 아니다. 그 강도와 빈도가 더할 뿐 어느 사회든 그들의 흔적은 널렸다.

미국기업연구소(AEI) 아서 브릭스 소장은 “인간은 세상을 이분법으로 단순화하는 ‘속 편한’ 극단주의에 끌릴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한다. 그는 한 리서치센터 설문조사에서 소득·교육·인종 등의 변수를 배제했을 때 극우주의자와 극좌 진보주의자가 중도주의자보다 훨씬 행복하다고 대답한 결과를 그 근거로 든다.

전세계적으로 불어 닥친 양극화 악풍도 극단주의자의 숙주(宿主)다. 오죽하면 신자유주의를 대변하는 국제통화기금(IMF)마저 “양극화가 세계경제를 위협하고 있다”고 경고할까.

▲다양성이 넘치는 민주주의 사회에선 갈등은 상존한다. 다만 다양성은 ‘양날의 칼’이어서 그 사회의 갈등 관리 역량에 따라 약이나 독이 될 수 있다. 선진사회에선 갈등이 생겨도 대화와 타협으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낸다.

반면 극단주의자들이 활개를 치는 지금 우리는 갈등이 투쟁과 담합(collusion)으로 변질돼 온 사회가 블랙홀로 빠져들고 있다. 불의(不義)엔 눈 감으면서도 자기의 불이익(不利益)은 수용 못한다. 불의는 못 본 체하고, 불이익은 참지 못하는 사회. 칼 포퍼가 지적한 열린 사회의 적이다.

극단주의자들이 활개치는 사회는 독선이 판치고, 이성은 마비된다. 이를 해소하지 않고는 누구도 국가사회의 통합을 이뤄낼 수 없다.

그러면 어떨 것인가. 정치권이든, 정부든, 학계든, 노동계든, 시민단체든, 언론이든, ‘중도적 공간’을 넓혀나가야 한다. 때론 보수주의자이면서 진보정책을 포용하고 진보주의자면서도 보수정책을 수용하는 ‘열린사회’로 나가야 한다.

채근담에 ‘대인춘풍 지기추상(待人春風 持己秋霜)’이라는 말이 있다. 남을 대할 때는 부드럽게, 자신한테는 가을서리처럼 엄격하게 하라는 말이다.

오늘 아침, 양극의 극단주의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다.

부영주 주필·편집인/부사장  boo4960@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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