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로 베어지지 않는 것도 있다
칼로 베어지지 않는 것도 있다
  • 부영주 주필·편집인/부사장
  • 승인 2017.07.23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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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일보=부영주 주필·편집인/부사장] 집권 초반의 권력을 ‘칼’이라고 한다. 문민정부 시절, 한 원로 정치인은 기자에게 그 이유를 대통령의 착각과 관련해서 이렇게 말했다. 임기 초반의 대통령들은 거의 예외 없이 착각에 빠져든다고 했다. 모든 일을 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문제라는 것이다. 자신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정부와 국가 모든 기관, 심지어 경제계를 비롯한 민간 부분도 일사불란하게 돌아간다. 국방 정책도 하루아침에 바뀌고 장군들의 별도 떨어진다. 수천명의 고관대작(高官大爵)의 인사도 쥐락펴락 한다.

이런 것을 몇 번 하다 보면 자제력이 뛰어난 사람이라도 세상이 자기 마음 먹은 대로 돌아간다는 오만(傲慢)에 빠지기 쉽다. 그 오만이 앞뒤를 보지 않고 ‘칼’을 휘두르게 된다고 한다. 그러다 보면 또 다른 착각에 빠진다. 세상을 겨눈 ‘칼’이 결국 자신의 심장을 향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이순신(李舜臣)은 그의 칼에 ‘…한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강산에 물들인다(…一揮掃蕩 血染山河)’라는 검명을 새겼다. 일세를 풍미한 무장(武將)답다.

하지만 이순신은 정작 두려워해야 할 상대는 ‘보이지 않는 적’이라고 했다. 후세에게 ‘칼로 베어지지 않는 것들을 칼로 벨 수는 없었다’는 의미심장한 글을 남겼다. 소설가 김훈은 ‘칼의 노래’에서 ‘칼로 적을 겨눌 때 칼은 칼날을 비켜선 모든 공간을 동시에 겨눈다’고 썼다.

일본에는 전설적인 검객 미야모토 무사시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싸움을 할 때는 눈을 크게 뜨고 전체를 두루 살펴야 한다고 했다. 여기에는 두 가지 눈이 있다고 말했다. ‘관(觀)’은 상대의 생각을 간파하는 마음의 눈이다. ‘견(見)’은 육안으로 상대를 포착하는 눈이다.

‘칼의 고수’들이 가장 경계하는 일이 착각이다. 상대의 눈과 칼 끝, 몸의 움직임을 통해 마음을 읽고 대국을 파악해야 한다는 뜻이다. 고수들은 절대로 서두르는 법이 없다.

▲세상은 칼의 자루를 쥔 쪽과 칼의 날을 쥔 쪽으로 나뉜다. 갑과 을이라고 할까. 군림하는 쪽이 있으면 눈치보는 쪽이 있다. 그러나 항상 이 관계는 일정하지 않다. 갑이 을 되고 을이 갑 되는 게 세상사니까 칼을 필요 이상으로 쓰면 제 칼에 자신이 베인다는 말이다.

역대 정권이 예외 없이 꺼내 들었던 개혁의 칼도 그랬다. 멀리 되돌아볼 필요도 없을 것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1990년 9월 2일 일기에서 ‘권력은 칼’이라며 ‘그 칼을 마구 휘둘러서 쌓이는 원망, 분노, 복수심 등은 되돌아와 그의 목을 조른다’고 쓴 적이 있다. 그런 그가 어떻게 됐나. 정치는 현실이다. 우리의 헌정사를 보면 대국을 보지 않고 의욕만 너무 앞세우고 현실을 착각한 나머지 그 역풍으로 정권이 흔들리고 끝내는 무너지는 참혹한 사례를 반복해왔다.

▲새 정부 3개월째다. 국민은 새 정부 출범과 함께 대통령 제 몇 호 ‘업무지시’ 형식으로 나온 문재인 대통령의 ‘칼’을 봐왔다. 문 대통령은 이런 신속한 개혁이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민주주의와 법치의 관점에서 볼 때 업무 지시는 최소한에 그쳐야 한다. 자칫 대통령의 업무지시는 이른바 지시주의 혹은 포고주의(decreeism)로 흐를 수 있기 때문이다. 가야사 얘기처럼 뜬금없는 말도 말아야한다. 지난번 정부 때 역사교과서 국정화 논쟁에 휘말리더니 이번에는 역사 해석에 정부가 개입한다는 우려를 줄 수 있다.

모름지기 올바른 개혁은 민주주의적 절차를 따르는 것이다. 입법화가 필요한 개혁 의제는 야당과 국회의 동의가 필수적이다. 법인세 인상과 소득세 증세 등 세법 개정이 필요한 사안은 더욱 그렇다. 증세 문제는 경제 전반에 미치는 파장을 따져봐야할 사안이다. 그런 다음 사회적 합의가 전제돼야 한다.

새 정부와 문 대통령은 이점을 명심해서 ‘개혁의 칼’과 함께 ‘협치의 칼’을 함께 준비해야 할 것이다. 개혁은 집권 초기에 칼날이 서있을 때 드라이브를 걸어야 성공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세상엔 칼로 베어지지 않는 것도 있다.

부영주 주필·편집인/부사장  boo4960@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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