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멋대로 놀 수 있는 자유를 허(許)하라
제 멋대로 놀 수 있는 자유를 허(許)하라
  • 제주일보
  • 승인 2017.06.13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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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수. 시인 / 문화기획가

[제주일보] 우리나라에서 가장 처절한 독재가 행해지고 있는 곳이 있다. 학교다. 재단이나 교장과 교사들의 교직 사회 문제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사회가 우리의 아이들에게 행하고 있는 비인간적인 독재를 말하는 것이다. 아이들의 미래를 위한다고 하면서 미래를 오히려 망치는 잘못을 저지르면서도, 그것을 느끼지도 깨닫지도 못하는 합법적 독재 기구를 말하는 것이다.

최근 한 TV토론 프로그램에서 패널로 나온 전직(前職) 장관이 ‘우리 나라 수능 문제를 풀어보니 5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다’며 교육 개혁의 필요성을 언급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지난 50년 동안 사회·경제·문화·과학적으로 엄청난 변화가 있었음에도 우리의 교육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현직 교사인 친구들과 만나는 자리에서는 매번 비슷한 화제들을 접하게 된다. 수업 시간에 자는 학생들, 딴 나라 이야기처럼 들려오는 학생 자살 사건들, 평준화의 탈을 쓴 고교 서열화와 입시 지옥, 예의와 존중을 찾아볼 수 없는 사제지간의 현실, 학생을 사이에 두고 어정쩡해진 교사와 학부모의 관계를 비롯해서 보험회사에서 통계를 낸 교사 평균 수명이 68세라는 신세 한탄까지.

이런 문제들의 근본 원인이 무엇이고 해결책은 무엇일까. 우리끼리 개똥 교육 철학을 중언부언하다가 아무런 해답없이 일어서곤 하는데, 기분이 영 개운치 않았다. 나는 우리 나라 학부모나 교사, 교육 정책 입안자, 그리고 학생 개개인까지 은연중에 의식화되어 있는 ‘공부’에 대한 개념 정립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원래 ‘공부’는 불교에서 ‘참선(參禪)’에 전력을 다 해 집중하는 것을 일컫는 말이었다고 한다. 그것이 최근에는 ‘학문을 배워 익히는 일’을 의미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러면 ‘학문’이란 무엇인가. 그 범주를 어떻게 규정해야 할 것인가. 그 인식의 틀이 바뀌지 않는 한 진정한 공부란 없다.

‘국영수’를 잘 하는 학생은 특별한 대접을 받는다. 예체능을 잘하거나 특수한 기술을 가지고 있는 학생은 별 볼 일 없는 애가 되고 공부 못하는 애,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시간 낭비하는 애, 미래가 불투명한 애 취급을 받는다. 그런데 그렇게 국영수, 국영수 하면서 공부한 애들 대다수가 원하는 직업이 또 죄다 공무원이다. 안정적으로 먹을 거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질만능주의와 황금만능주의를 뛰어 넘어 자신의 신념과 가치관, 진정한 자아실현을 추구하라고 가르치면서도 우리 나라 교육 체계나 사회 구조는 그것을 따르지 못하고 있다.

나는 잘 모르겠다. 주요 과목 선생님과 기타 과목 선생님이 존재하는 나라, 그래서 주요 과목 잘 하는 우수 학생과 대입시험에 전혀 쓸 모 없는 기타 과목을 좋아하는 열등 학생이 존재하는 나라, 국영수 잘 하는 학생들을 위한 특수학교를 세워 운영하는 나라가 세상에 또 있을까.

우리나라 백년지대계(百年之大計)를 논의하는 교육 전문가들이여. 이런 현실이나 제대로 직시하고 교육 정책을 짜 주시길. 수업 시간에 자거나 학교 수업을 따라오지 못하는 아이들이 문제가 아니라, 학교 수업을 너무 잘 따라 오는 아이들이 문제라는 생각은 안 해 보셨는지 묻고 싶다.

국영수만 강요하지 말라. 국영수만 공부가 아니다. 앞으로 교육 개혁은 어떻게 하면 이런 아이들의 다양한 욕구를 해소해 줄 수 있는 교육 과정과 정책을 구축해내느냐 하는 데 집중되어야 한다. 커피숍에도 터지는 와이파이를, 학교에서는 공부에 방해된다고 허용도 하지 않는 인터넷 선진국, 대한민국에서, 그래서 한 마디 하고 싶다.

우리 아이들에게 제 멋대로 놀 수 있는 자유를 허(許)하라.

그리고 그 동안 국영수를 못 한다고 구박했던 아이들에게 용서를 구하라.

제주일보 기자  isuna@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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