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말 하는' 소신 정치인, 합리적 보수 아이콘으로 '대권' 도전
'할 말 하는' 소신 정치인, 합리적 보수 아이콘으로 '대권' 도전
  • 변경혜 기자
  • 승인 2017.04.25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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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DI 떠나 이회창 '경제교사'로 정계 입문…17대 총선때 국회 입성

[제주일보=변경혜 기자] 새로운 보수, 합리적 보수를 선언한 유승민은 한손엔 ‘안보’를, 다른 한손엔 ‘복지’를 들고 대선전에 뛰어들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비서실장을 지내는 등 자신의 정치인생 중 대부분을 박근혜와 함께했으나 ‘할 말을 하는’ 소신으로 늘 대립각을 세워왔다.
공천학살 수모를 겪었으나 무소속 당선으로 보수의 텃밭에서 살아남은 유승민은 자타가 공인하는 경제전문가로 ‘증세없는 복지는 허구’ ‘대한민국은 왕조가 아닌 민주공화국’ 등 수많은 어록을 남겼다. 그의 합리적 보수의 정치실험이 대선에서 어떤 평가를 남길지 주목된다.

# 박근혜의 남자에서 보수의 새 아이콘으로
2000년 한나라당의 싱크탱크인 여의도연구소에 42살 젊은 소장이 기용됐다. 파격인사였다. 미국 위스콘신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아 한국개발연구원(KDI)에 있던 그의 경제정책 능력을 눈여겨 본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가 낙점한 것이다. 당시 유승민은 KDI에서도 소위 잘 나가는 선임연구원이었으나 외환위기(IMF) 극복을 위해 김대중 대통령(DJ)이 추진한 재벌구조정책에 대해 ‘관치경제’라고 반기를 들었던 상황이었다.
KDI를 떠난 유승민은 두 번의 대권 고배를 마신 이회창의 경제교사로 정치에 입문한 뒤 2004년 17대 총선에서 비례대표로 국회에 입성했다. 당시 한나라당(자유한국당 전신) 대표였던 박근혜는 삼고초려 구애를 하며 초선이었던 유승민을 비서실장으로 발탁했다. 10년 정치적 인연의 시작이자 악연의 시작이었다. 2007년 대선에 출마한 박근혜를 도와 캠프에서 정책메시지 총괄단장를 맡았다. 당내 예선이 본선으로 치부될 만큼 가장 치열했던 경선으로 손꼽히는 ‘이명박-박근혜’ 경선에서 최전방 수비수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치열했던 경선만큼이나 내상도 깊어 경선 이후 친이계가 장악한 당내에서 유승민을 비롯해 친박계의 암흑기가 시작됐다.
2011년 유승민은 심기일전, 한나라당 전당대회에 ‘용감한 개혁’을 슬로건으로 출마해 친박계로선 예상외 돌풍으로 2위의 성적을 거뒀다. 1위를 차지한 홍준표 당대표와 당 지도부 진입에 성공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친박계로 분류, 박근혜 후광이란 꼬리표가 달렸으나 독자적인 ‘유승민 정치’를 시작한 때도 그 즈음부터다.
박근혜 비대위원장 시절에도 ‘새누리당 당명’ 채택을 놓고 종교적 색채가 짙다며 반대했고 박근혜 정부 들어서도 정부 정책에 대한 비판을 공개적으로 해오다 국회법 개정안-의원공천 문제 등으로 박근혜와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다.

유승민 바른정당 대통령 후보가 걸어온 길. 사진 왼쪽부터 대구 중구 삼덕동 거주 당시 기르던 강아지와 함께, 부산 용두산 공원 앞에서 아버지와 함께, 수경사 33경비단 일병 복무 당시(왼쪽), 미국 유학 뒤 한국개발연구원(KDI) 시절 모습, 가족사진. <유승민 캠프 제공>

# ‘청와대 얼라들’ 후 원내대표에서 물러나기까지
박근혜와 등 돌리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청와대 얼라들 발언’도 이때 즈음이다. 2014년 10월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국정감사에서 당시 박 대통령의 방미 간담회에서 당초 계획됐던 발언이 사라진 것이 도마 위에 올랐다. 사전 배포된 자료에는 ‘대한민국은 중국에 경도된 게 아니다’라는 표현이 있었지만 실제 대통령의 발언에선 빠진 것이다. 외교 결례로 비판이 이어졌고 유승민은 국감장에서 “외교부에 알아보니까 외교부 북미 1과, 2과 모두 박근혜 대통령의 간담회 관련 자료는 자기들은 전혀 모른다고 한다. 이것을 외교부 누가 하나? ‘청와대 얼라들’이 하나?”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이른바 ‘문고리 3인방’을 빗댄 말이었다.
유승민의 ‘할 말 다하는’ 소신은  박근혜와의 거리를 더욱 멀게했다. 2015년 4월 집권여당인 새누리당 원내대표에 자력으로 선출된 후 국회 교섭단체 원내대표 연설에 나선 유승민은 “증세없는 복지는 허구”라며 박근혜 정부의 복지정책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당시 유승민은 “지난 3년간 예산 대비 세수부족은 22.2조원이다. 증세없는 복지는 허구임이 입증되고 있다. 이제 우리 정치권은 국민 앞에 솔직하게 고백해야 한다(중략). 10년 전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처음 양극화 해소를 시대적 과제로 제시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통찰을 높이 평가한다. 새정치민주연합이 경제·안보정당을 말하고 정의당이 미래산업 정책을 말한다. 놀라운 변화다. 그 변화 속에 국가의 미래를 위한 고민과 진정성이 담겨 있으리라고 기대해 본다”고 말했다.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으며 단숨에 대선주자로 발돋움한 유승민의 이 연설에 새누리당은 냉담했고 야당은 박수를 보냈다. 한미전시작전권 재협상 입장에 대해서도 대선공약 파기라며 박근혜의 사과를 요구하기도 했다. 행정부의 견제권한을 강화하는 국회법 여야 합의에 대해 친박에선 그를 배신자로 낙인찍기 시작했다.
2015년 6월 국무회의에서 박근혜는 공개적으로 유승민을 겨냥, “자기정치를 하지 말라”며 국민들을 향해 “배신의 정치를 심판해달라”고 호소했고, 유승민은 “대통령께 진심으로 죄송하다”고 고개를 숙였지만 갈등은 해결되지 않았다. 결국 원내대표 연설 3개월 만에 쫒겨나듯 원내대표직에서 물러났다. 유승민은 자신의 사퇴를 결정한 의원총회 후 기자회견을 갖고 “저의 정치생명을 걸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을 천명한 우리 헌법 1조1항의 지엄한 가치를 지키고 싶었다”며 “진흙에서 연꽃을 피우듯, 아무리 욕을 먹어도 결국 세상을 바꾸는 것은 정치라는 신념 하나로 저는 정치를 해왔다”고 불편한 심경을 토로했다. 박근혜와 정치적으로 결별한 순간이다.
유승민이 박근혜와 갈등의 폭이 커질수록 대선주자 지지율은 높아갔고 당내 갈등도 커졌다. ‘배신자’ 낙인이 찍힌 유승민과 유승민계로 분류되는 동료 의원들을 공천에서 탈락시킨 것이다. 결국 탈당, 무소속 당선으로 국회에 돌아온 유승민은 ‘국정농단 세력과의 결별’을 선언하며 헌정사상 초유의 현직 대통령인 박근혜의 탄핵소추안 가결에 동참하고 합리적 보수를 주창하며 바른정당을 창당한다.
보수정당으로서 사드 배치 입장 등 확고한 안보분야와 달리 유승민이 들고 나온 대선공약의 경제-복지정책은 가장 진보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재벌 해체 수준은 아니더라도 출자총액제한 강화, 기업오너 횡령·배임에 대한 처벌 강화 및 사면복권 금지 등 재벌개혁 공약은 보수 정당으로선 파격적인 정책이다.
또 칼퇴근법, 비정규직 고용총량제한, 중부담 중복지 등 노동복지분야 공약은 그의 낮은 지지율과 달리 이번 대선에서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

# 아버지에 이어 2대에 걸친 악연
1958년 대구에서 유승민은 유수호 전 의원-강옥성씨의 삼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 유수호 전 의원은 부산지법 부장판사를 지낸 법조인으로 박근혜 전 대통령의 아버지 박정희와 악연이다. ‘대쪽판사’로 불렸던 그는 1971년 대선 당시 공화당 박정희 후보의 울산지역 개표결과를 조작발표한 공무원들에게 징역형을 선고했고 같은 해 시위를 주도해 구속된 부산대 총학생회장(김정길 전 행자부 장관)을 석방하는 등 몇차례 소신판결로 박정희 정권의 눈에서 벗어났다. 얼마 뒤 유수호는 특별한 이유없이 판사 재임용에서 탈락한다. 변호사로 개업한 덕에 유승민은 집안 형편이 나아졌다고 한다.
유승민은 자신에게 ‘금수저 도련님’이란 지적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그의 청력이 좋지 않은 이유를 어릴적 넉넉지 않은 집안 형편이었기 때문이라 설명한다. 판사 남편을 둔 유승민의 어머니는 중이염에 걸린 돌쟁이 아들의 병원비 마련을 위해 영화 암표를 팔다 붙잡히기도 했다. 결국 풀려나긴 했지만 유승민은 병원 치료를 제때 받지 못했다.

변경혜 기자  bkh@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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