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과 연결될 준비 됐나요?"
"사람들과 연결될 준비 됐나요?"
  • 뉴제주일보
  • 승인 2017.04.06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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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서가 추천하는 이달의 책] 정세랑 '피프티 피플'

[제주일보] 가끔 자료실 북트럭에 반납된 책을 만지면서 책을 빌렸던 사람의 삶을 상상해볼 때가 있다.

‘가장 쉬운 요리 교과서’, ‘야생화 촬영기법’, ‘의천도룡기’를 빌려갔던 이용자는 은퇴 후 집에서 스스로 밥을 해먹기 시작하고 주말에는 야생화를 찍으러 다니는 무협소설 마니아 할아버지가 아닐까하는 시시한 상상. 만들어 먹은 음식 중엔 뭐가 제일 입에 맞으셨을까? 야생화 사진은 혼자 찍으러 다녔을까? 그렇게 상상의 풍선을 마구 부풀리다보면 있지도 않은 상상 속의 인물의 삶이 문득 궁금해진다.

이런 단편적인 조각으로 모르는 사람의 삶을 짐작하는 것은 무례하고 위험한 일이라는 걸 알지만, ‘도서관 이용자’라고 뭉뚱그려 부르는 늘 막연하고 어려운 미지의 집단이 각자의 서사를 지닌 개인의 합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지 말고 사람에 대한 호기심을 잃지 말자는 일종의 다짐 같은 거라고 스스로의 행동을 제멋대로 합리화하곤 한다.

정세랑 작가의 ‘피프티 피플’은 사람들 개개인이 지닌 이야기들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어루만지는 소설집이다. 수도권의 한 중소도시에 있는 대학병원을 중심으로 의료진과 직원들, 환자들과 그들과 관계 맺었던 50여 명의 사람들의 이야기가 옴니버스 형식으로 자신의 이름이 소제목으로 달린 챕터 안에서 담담하고 섬세하게 서술된다.

소설 속 주인공들은 대부분 자신의 자리에서 성실하게 주어진 일들을 해내는 선량한 사람들이다. 어떤 이에게 닥친 상황은 귀엽고 사랑스럽고, 또 다른 이에게는 잔인하고 가혹하다. 각자에게 주어진 상황은 천차만별이지만 자신의 문제들을 나름의 방식으로 풀어나가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다보면 자연스럽게 등장인물에 대한 애정이 생겨난다.

정세랑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한 사람이라도 당신을 닮았기를, 당신의 목소리로 말하기를 바란다’라고 기원하고 있는데, 나의 경우에는 나와 닮지는 않았지만 무척 닮고 싶은 사람 사서 ‘정한나’를 발견하고 많이 설레었다.

‘한나는 사서였다’라고 과거형으로 시작하는 정한나의 이야기는 ‘아무도 한나가 사서인 걸 모르지만 한나는 사서로 살 것이다. 앞으로 또 어떤 직업을 갖게 될지 몰라도 비밀리에는 사서일 것이다’라는 미래시제의 서술을 거쳐 ‘수레와 책의 무게가 한나의 무게를 지탱해주었다’라는 문장으로 끝이 난다.

50여 명의 사람들의 이야기들은 결코 개인만의 서사로 끝나지 않는다. 아드레날린 중독 응급의학과 의사인 ‘이기윤’의 이야기에 잠깐 등장했던 귀에 벌이 들어가 응급실에 왔던 환자가 뒷부분에선 ‘문우남’이라는 제 이름을 가지고 다시 나타나 아내 선미를 제 발등 위에 얹고 춤을 추는 사랑스러운 광경을 보여준다.

각각의 사람들이 타인의 이야기 속에 자연스럽게 등장하며 ‘나’의 이야기에서는 내가 주인공이지만 타인의 이야기에서는 내가 그저 조연 혹은 배경일 뿐이라는 너무 당연하지만 곧잘 잊어버리곤 하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이런 식으로 헐겁게 연결된 인물들은 서로를 스쳐지나가기도 하고 때론 삶의 모습을 완전히 바꾸어 놓기도 하면서 타인의 삶에 크고 작은 흔적들을 남기며 결국 긴밀하게 이어져 서로를 팽팽하게 잡아당긴다.

이러한 ‘이어짐’의 힘은 등장인물들이 모여 있던 극장에서 일어난 화재 현장에서 서로의 불안을 다독이면서 아무도 죽지 않게, ‘유가족을 만들지 않게’ 만든다. 이어져 있기 때문에 서로를 살린다. 반대로 이어져있지 않다면? 책에 나온 가습기 피해자들과 싱크홀에 빠진 사람들과 이별 살인을 당한 여학생의 이야기를 나와 연결돼 있지 않은 타인의 개인적 불행으로 치부하고 외면해 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작가는 작중 인물 중 하나인 이설아의 입을 대신 빌어 말한다. “가장 경멸하는 것도 사람, 가장 사랑하는 것도 사람. 그 괴리 안에서 평생 살아갈 것이다.”

이 말이 내겐 사람들과 기꺼이 연결되겠다는 일종의 선언으로 들린다. 그렇다면 나는 기꺼이 연결될 준비가 돼있나? 던져지는 질문들에 부끄러운 마음이 먼저 들게 만드는 책이다.

<강희진 제주도서관 사서>

뉴제주일보  webmaster@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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