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조절장애는 없다
분노조절장애는 없다
  • 뉴제주일보
  • 승인 2017.03.26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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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성.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제주일보] 진료실에서 상담을 하다보면 폭발하는 심한 분노에 대해 호소하는 분들이 종종 있다. 운전 중 앞차가 깜박이도 켜지 않고 갑자기 훅 끼어들 때, 머리털이 곤두서면서 가속 페달을 끝까지 밟아 앞차를 받아버리고 싶은 충동이 든다는 것이다.

또한 물건을 사러 갔다 판매 직원의 불친절에 너무도 화가 나서 큰 소리를 치며 다투고 나서 후회하시는 분들도 적지 않다. 특히 이런 행동은 음주를 했을 때 심해지는데, 술자리에서 친구들과의 사소한 말다툼 중에 치밀어 오르는 화로 인해 큰 폭행사고가 발생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이런 경우가 반복되면 흔히 ‘내가 분노조절장애 환자가 아닐까’ 걱정하게 되는데 사실 분노는 어떤 국제적 질병분류에 있어서도 진단 기준의 항목으로 포함되어 있지 않다. ‘분노발작’이라는 용어가 있지만 그 자체가 진단은 아니고, 우울증에서 ‘분노/공격성 아형’이라는 분류가 있으나 독립적인 진단명은 아니다.

즉, 분노조절장애라는 병명은 의학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정신의학적 진단에서 비교적 근접한 것이 ‘간헐적 폭발성 장애’인데, 이는 심각한 외적 손상이나 상해를 유발하지 않는 언어적 공격성의 폭발이 일주일에 2회 이상 3개월 내내 지속되거나 재산의 파괴나 신체적 부상을 입히는 심한 물리적 폭력이 1년 동안 3회 이상 나타나는 경우를 일컫는데, 그 공격성의 정도가 화를 나게 만드는 자극에 비해 심각하게 과도한 경우 진단하게 된다.

한마디로 사소한 일에도 극도의 조절되지 못하는 화를 습관적으로 내는 경우를 말하는데 사실 다른 동반 질환이 없이 그렇기도 쉽지 않다.

또 분노와 연관하여 외상 후 격분 장애(Post Traumatic Embitterment Disorder, PTED)라는 표현도 발견되는데, 이는 독일 통일 후 이전 동독지역의 주민들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증상을 연구하며 주창된 용어이다. 정신적 고통이나 충격을 당한 이후에 부당함·모멸감·좌절감·무력감 등이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경우로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는 믿음에 근거한 증오와 분노가 핵심이다. 부당함과 억울함·분노가 중요한 호소라는 점에서 ‘화병’과도 유사하다.

화병은 전세계적으로 사용되는 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편람 제 4판(DSM-IV)에서 연구용 진단 기준으로 정의되어 있는 우리 문화 고유의 질병인데 17세기 조선왕조실록에도 등장한다. 진단 기준에 의하면 화병은 개인적으로 분노를 유발하는 상황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나 참을 수 밖에 없을 때 ‘주관적인 분노/억울함/분노의 외적 표현/열감/증오심/한(恨)’ 중에 3가지 이상에 해당되고, ‘속에서 치밀어 오름/답답함/가슴 뜀/입마름/한숨/잡념/많은 하소연’ 중에서 4가지 이상의 증상을 보일 때 진단된다.

사실 이 모든 질환들은 분노장애 혹은 분노조절장애와 같은 용어가 있다면 모두 하나로 묶을 수 있다. 그래서 분노장애에 대한 새로운 진단 범주를 제안하는 연구 집단도 존재하지만 한편으로 보면 분노는 어느 하나의 질병 범주에 집어넣을 수 없는 인간의 너무나 보편적인 감정상태 중 하나 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마음의 큰 상처, 공평하지 못해서 억울하고 분하지만 참을 수 밖에 없는 현실이 존재한다.

욱하는 화를 참지 못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큰 상처를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그 모든 사람들에게는 자기 조절과 통제·이해와 수용보다 먼저 위로와 따뜻한 관심이 필요한 것이다.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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