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정 장애
결정 장애
  • 제주일보
  • 승인 2017.03.19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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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자. 세이레어린이극장 대표

며칠 전, 남편이 그런다. 왜 욕심이 없냐고, 욕심 부려도 될 일을 이런 저런 눈치 보는 것 같다고. 아마 결정을 늦추는 내가 답답해서 그런 말을 한 것 같다. 그러나 욕심이 없어서 그런 건 아니다. 내 지인들은 나를 두고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나는 결정 장애자다. 외식하려고 메뉴를 고를 때조차 뭘 먹어야 할지, 옷 하나 고를 때도 어느 것이 나에게 어울리는 지 망설일 때가 많다. 귀도 얇아 예쁘다고 하면 정말 예쁜 줄 알고 사들고 왔다가 식구들에게 핀잔을 들은 경우도 허다하다. 아예 엄마하곤 쇼핑을 안 한다고 할 정도다. 돈만 내라는 식이다.

하는 일이 선택하고 결정할 게 많은 데도 이렇게 한심하게도 늘 주저하게 되고 남의 결정을 따르는 편이다. 실패할 두려움 때문인지, 내 선택이 옳다는 확신이 없어서인지, 타인의 시선을 너무 의식한 때문인지, 암튼 이런 내가 싫다. 기준이 모호한 내가 부끄럽다. 솔직히 외부의 시선이나 평가 때문에 그러는 것은 절대 아니지만 나의 주변머리가 요것밖에 안 돼 속상하기도 하다. 머리로는 다 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온당히 겪어야 한다고, 그것조차 삶의 일부라고, 자기만의 방식·기준·색깔을 찾아야 한다고, 그래야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내 욕망을 채울 수 있다고. 그러기 위해서는 스스로 선택·결정할 수 있는 자존감을 키워야 된다고, 내 삶의 주인은 나라고. 그런데도 50을 훨씬 넘은 나이에도 나는 여전히 결정 장애를 겪고 있다.

 

장애라고 하면 도움이 필요한 심각한 장애를 먼저 생각하겠지만 현대인들은 정신적인 장애를 한 둘은 다 겪고 산다고 할 정도로 스트레스가 많다. 불면증으로 알고 있는 수면장애, 연예인들이 많이 겪는다는 공황장애, 사람 얼굴을 잘 알아보지 못한다는 안면인식 장애, 주위 사람들의 말투나 표정 몸짓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는 과잉감정 등등. 정신적인 활동을 과잉으로 하는 사람들의 특징이라고 하는데 사실 중요한 일정을 앞두거나 긴장할 일들이 생기면 잠을 설치는 경우가 종종 있고 스트레스가 많다 보면 짜증에다 화까지 그러다보면 다 된 밥에 코 빠뜨린다고 될 일도 안 되는 경우가 있다. 물론 치료를 해야 나아지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예민해서 그런 것 같다. 하루하루를 알차게 보내야 한다고 다그치고, 컴퓨터를 켜놓고 집중 안 돼서 글도 안 써진다고 자신을 비웃고. 암튼 우리 안에 우리를 못살게 구는 폭군이 사는 거 같다. 누가 나를 비난하지도, 꾸짖지도 않는 데도 ‘못 살아, 못 살아’를 연발하고 ‘닭대가리, 소대가리’라고 자기머리를 쥐어박는 폭군이 사나보다.

 

그런데 아주 조금 위안이 되는 건 나 뿐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멍 때리는 대회까지 있는 거 보면 경쟁사회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얼마나 많았으면 이런 대회까지 있나싶지만 살아보니 많다. 정말 많다. 하루하루 새로운 시스템이 등장하고 이제 겨우 기존 시스템에 적응했다 싶으면 다시 새로운 시스템이 등장하여 나 같은 머리 둔한 사람을 곤혹에 빠뜨린다. 나이는 들어가고, 머리는 둔해지고 몸은 뚱뚱한 아줌마에서 할머니로 변해 가는데 정말 얼마나 더 신경 곤두세우며 살아야 하는지, 얼마나 더 배워야 하는지, 최근까지 e나라도움인지 뭔지를 익히느라 신경 좀 썼더니 머리가 지끈거린다.

쉬고 싶은데, 공연은 코앞이라 쉬지도 못하고 지친 몸을 끌고 다닌다. 사실 작품하기에도 버거운데 행정에다 뭐다하며 붙들고 일일이 쫓아다녀야 하니 몸은 파김치 아니 머리는 쪼글아질 정도다. 그뿐이면 좋으련만 돈도 벌어야 한다. 올해로 예술강사를 해온 지 14년째다. 그동안 나름 보람도 많았고 문화예술교육을 하는 자긍심도 생겼고 예술강사로서 자신감도 생겼다. 그런데 아직도 9개월 계약직이다. 매년 강사에 지원하고 서류 심사를 받고 합격하면 다시 계약해야하는 떠돌이강사, 3대 보험만 가입이 가능하고 건강보험은 가입도 안 되는 불안정한 직업을 가진 연극인이다. 그래도 옛날 생각하면 세상 좋아졌다고 연극하면서 굶지는 않겠다는 사람도 있지만 사실 늘 부유한 느낌이다. 남들처럼 똑똑하지 못하고 결정 장애를 겪는 나로서는 더 집중하는 시간이 많아야 하는데 생활비를 벌어야 하고 여러 가지 사업 공모 정보도 찾아야 하고 기획서 작성·정산 등등 할 일이 태산이다. 딴 걱정 말고 오롯이 작품에만 집중하라는 지원사업은 불가능한 건가? 그럼 생활고에 허덕이는 예술인은 없으련만 문화융성은 저절로 이루어지겠구만, 문화예술의 섬은 따 논 당상이겠구만….

 

말이 많아졌다. 머리 아프다고 투정이 심해졌다. 잠시 작품에만 집중하기로 하자. 문득 이번 작품에 나오는 대사 중 ‘잘 비워야 또 채우지’라는 말이 생각난다. 비울 건 비워야 새로운 걸 집어넣을 여유도 생기는 법. 탄핵이다, 대선이다, 사회는 빠르게 돌아가고 있다. 종잡을 수 없을 정도다. 그러니 지금은 고민이나 걱정은 잠시 내려놓자. 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힘을 비축하기로 하자.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따스하다. 봄이다.

제주일보 기자  hy0622@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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