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된다”고 타이르는 사람들이 없다
“안 된다”고 타이르는 사람들이 없다
  • 부영주 주필·편집인/부사장
  • 승인 2017.03.12 17:5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제주일보=부영주 주필·편집인/부사장] 독일의 대문호 요한 볼프강 폰 괴테(1749∼1832). 그가 40대 중반 때의 일화이다. 프랑스에서 자유와 평등을 내건 시민혁명(프랑스대혁명, 1789~1795)이 일어났다.

독일의 지식인들은 환호했다. 혁명 5년의 와중이었던 1793년 세밑, 독일 도시에서는 혁명의 상징으로 작은 단두대(斷頭臺·기요틴) 모형을 장난감으로 만들어 팔았다. 신문에는 누구의 목이 잘렸다는 보도가 넘쳐서 피가 마를 새 없었다.

농촌도시에 살던 괴테는 네 살 아들의 생일 겸 크리스마스 선물로 단두대의 모형을 사주려고 했다. 어린 아들에게 시민혁명과 자유의 의미도 가르쳐주려고 했다. 괴테는 고향 프랑크푸르트의 어머니에게 그 모형 장난감을 사서 보내라고 편지를 썼다.

어머니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노(No)”였다. “무슨 짓이냐, 아이에게 그런 고약한 것을 갖고 놀게 하겠다니. 살인과 유혈의 도구를 아이 손에 쥐어주겠다니. 싫다. 절대 그런 짓을 해서는 안 된다.”

이 일화 한 편에서 자유와 평등이란 대의(大義), 혁명의 미명(美名) 아래 자행된 기요틴의 만행, 그 둘을 분간 못한 젊은 괴테의 불혹(不惑)아닌 미혹, 그 점을 “안 된다”고 타이른 모정(母情)을 읽어 볼 수 있다.

▲말이 쉬워서 “안 된다”지, 노(No)라고 하기는 쉽지 않다. 요새 우리사회가 그렇지 않은가. “안 된다”고 타이르고 말리는 사람이 없다.

대신 넘쳐흐르는 것이 자유다. 공공장소에서 큰소리로 떠드는 것도 자유고, 한라산 국립공원 안에서 출입금지 표지가 있는데도 제 마음 내키는 대로 들어가는 것도 자유이다.

또 해안도로에서 새벽까지 술을 먹다가 온갖 쓰레기를 그냥 버려둔 채 가는 것 역시 자유이고, 중국의 사드 보복으로 일자리가 없어진 관광업계 종사자들이 해고와 무급 휴가로 눈물을 흘리고 있든 말든 ‘나 몰라라’ 하는 것도 자유다.

갈치연승어선 어민들이 갈치를 잡지 못해 생명줄이 끊어지든 말든 “그건 정부차원 일”이라고 하는 것도 자유다.

그리고 자기와 뜻이 안 맞으면 아예 말조차 꺼내지 못하게 대드는 것도 자유이며, 선진국에서는 이러지 않는다고 하면 “그러지 않는 자들이 병신”이라고 말하는 것도 자유다. 또 이를 보면서 “그러면 안 된다”고 타이르지 않고, 바라만 보는 것도 자유다.

▲자유는 많다. 말로는 개혁을 말하면서 촛불 시위에 편승하고, 태극기 시위에 붙어 ‘편 가르기’로 국민을 현혹하는 것도 자유이다. 그것이 개혁이냐고 의문을 제기하면 개혁저항 세력으로 몰아붙이는 것도 자유다.

다 자유만 있다고 하지, 자기 책임이 있다고 하는 사람은 없다.

그것만이 아니다. 한 때 억울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면 그 억울함 때문에 그 다음에는 무슨 짓을 해도 자유라고 한다.

자유에는 반드시 책임이 있다. 자유가 있는 세상에는 그 자유가 때론 “안 되는 일”이라고 타이르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 “안 된다”는 사람은 없고 사회적 책임은 실종됐다.

사회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개인은 있을 수 없다. 개인은 상호 의존적인 존재이고 상호 의존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에 의무감을 갖고 있는 동시에 타자(他者)에 대한 의무를 지고 있다. 자기 자신과 타자에 대한 의무가 사회적인 책임감이다.

▲공정한 사회를 위한 정의의 촛불, 나라의 안녕을 위한 애국의 태극기. 이런 대의와 미명을 말하자면 무책임이 없는지도 돌아보아야 한다.

이제 촛불을 들었던 사람들은 나라를 법치(法治)에 맡기고 일상으로 돌아가자고 말해야 한다. 태극기를 들었던 사람들은 민주주의와 법치에 승복(承服)하자고 타일러야 한다. 촛불을 들 자유가 있고 태극기를 들 자유가 있다면, 일상으로 돌아가야할 책임과 승복해야 할 책임이 있다.

자유와 책임이 손에 손을 잡고 함께 가지 않고서는 문명사회가 될 수 없다.

문명사회를 지향하지 않고 사회발전을 말한다는 것은 속임수일 뿐이다. 이래서는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안 된다”고 말하지 않는 언론의 무책임도 가려내야 한다. 잘못된 일에 “그래선 안 된다”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공모(共謀)다. “침묵이 금”이라는 사람들에게도 책임을 묻고 따질 일은 따져야 한다.

‘노(No)’라고 해야 할 때 ‘노’라고 할 수 있자면 용기가 필요하다. 임금 앞에서 죽음을 무릎쓰고 아니 되는 것은 “이래선 안 된다”고 말했던 대관(臺官)의 미학(美學)을 생각한다.

부영주 주필·편집인/부사장  boo4960@jejuilbo.net

Tag
#N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