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아이히만
서울의 아이히만
  • 제주일보
  • 승인 2017.02.08 14:4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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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제주지역사회교육협의회 부회장

아이히만은 히틀러 치하에서 유대인이주국을 총괄한 관료로서 유대인 학살에 깊숙이 관여했던 인물이다. 1960년에 체포되어 예루살렘의 법정에 선 나치의 하수인을 지켜본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그의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자신의 개인적인 발전을 도모하는 데 각별히 근면한 것을 제외하고는 아이히만은 어떤 동기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는 단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결코 깨닫지 못한 것이다. 그는 어리석지 않았다. 그로 하여금 그 시대의 엄청난 범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게 한 것은 순전한 무사유(Sheer thoughtlessness)였다.’

아이히만은 상부의 명령에 따라 행동했을 뿐이라며 무죄를 주장했다. 하지만, 아이히만은 자신이 수행한 임무가 어떤 의미로 다가올지 성찰하지 않음으로써 유대인들에게는 엄청난 희생을 불러왔다. 한나 아렌트는 더불어 살아가는 삶에서 ‘사유’란 하지 않아도 상관이 없는 ‘권리’가 아니라 반드시 수행해야만 할 ‘의무’라고 강조하며 홀로코스트와 같은 역사 속 악행이 이처럼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행해졌다는 ‘악의 평범성’ 을 설명했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작성을 사주했다는 분이 영장 실질심사에서 판사에게 그것이 범죄인 줄 몰랐다고 진술했다고 한다. 당시 비서관이었던 분과 함께 두 분은 국회 청문회에서 한결같이 “몰랐다”, “기억 안 난다” 했지만 모두 거짓말이었다. 헌법적 가치보다 공안의 가치를 우선하여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권력과 권위에 순종하느라 타인의 희생을 강요하는 중대 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작금의 국정농단 사건과 관련하여 범죄자가 된 고위 공직자들에게 느껴지는 두 가지가 부끄러움을 모른다는 것과 죄의식이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수 십 번을 물어도 끝가지 거짓말을 했다. 자기 양심을 속인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인데, 자신들이 지시를 내리고 동원했던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는 줄을 알면서도 표정 하나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야말로 선과 악이 전도된 자기 합리화로 ‘악의 평범성’이 그대로 발현된 분들이었다.

어찌 보면 우리 사회 엘리트의 타락은 우리의 교육현실이 낳은 필연적 결과다. 치열한 경쟁에서 자신들이 이긴 결과로 사회로부터 대접받고 보상받아야 된다는 특권의식을 당연시 여기는 것이다. 사회 지도층으로서 역할과 책임보다는 경쟁에서 승리했다는 권리의식만 가득한 사람들이다.

고성장 시기, 부동산 폭등과 함께 ‘졸부’라는 말이 생겨났었다. 가지고 있던 땅 값이 올라 갑작스럽게 부자가 되었지만 언행과 품격의 수준이 떨어지는 사람을 비웃는 말이었다. 작금의 상황은 ‘교육졸부’, 많이 알고는 있지만 대학입시와 고시에만 특화된 지식, 사회적 윤리와 책무는 바닥 수준인, 우리 사회에서 사라졌던 졸부들이 가짜 엘리트로, 타락한 엘리트들로 다시 나타난 형국이다.

이번 국정농단 사태에서도 잘못된 지시를 거스르거나 제지한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많은 사람들이 죄의식 없이 타락했으며 잘못된 지시를 그대로 따랐다. 일제 강점기부터 거의 100년간 진행돼온 말 잘 듣는 국민을 위한 주입식 교육의 결과다. 21세기는 더 이상 지식의 시대가 아니며, 얼마나 많이 아는가보다 스스로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 필요한 시대다.

몰락하는 낡은 교육의 변화를 감지하는 현명한 교사, 현명한 부모라면 결코 아이들의 성적표에 담을 수 없는 성장 가능성에 주목을 해야 한다. 우리 아이들이 스스로 행복하고 21세기 시대가 필요로 하는 인재로 자라기 위해서는 독서와 대화가 중요하다. 좋은 책을 읽고 어른들과 함께 이야기만 할 수 있는 환경만 조성돼도 아이들은 자신의 잠재력 충분히 꽃 피워내고 행복한 삶을 살아 갈 것이다.

제주일보 기자  hy0622@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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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 2017-02-16 14:44:38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생각의 사유..공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