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의보감 "제주산 감귤만 약초로 사용"…300만년 전 자생
동의보감 "제주산 감귤만 약초로 사용"…300만년 전 자생
  • 뉴제주일보
  • 승인 2016.12.14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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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한의약, 그 역사속으로…<6>제주, 국내 유일의 감귤류 약초 산출지(5)
올 12월의 제주 동정귤나무 - 광령리 귤나무
김일우 문학박사·㈔제주역사문화나눔연구소장

[제주일보] 조선시대 때 정부는 감귤의 산출지를 제주 이외의 곳으로도 확대해보려는 노력을 부단히 기울였다. 이는 일시적으로 성공했던 것 같으나, 그것이 감귤류 약초 산출지의 확대로 이어졌던 것은 아니다. 곧, 국내 산출의 감귤 가운데 오직 제주의 감귤만이 약초로써 쓰였다는 것이다.

1454년(단종 2) 간행의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를 보면, 귤이 경상도의 동래와 전라도의 순천·고흥은 토공(土貢), 전라도의 영암 경우는 토산(土産) 가운데 하나로 올라가 있다.

토공은 종종 각 지방의 토산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지정·상납케 함으로써 문제가 야기되곤 했으나 통상 각 지방의 토산물로써 중앙정부에 바치게 했던 산물이다. 토산은 각 지방의 토산물을 말한다. 이로써 귤이 제주 이외의 지역에서도 났음이 드러난다. 이는 조선 정부가 건국 초창기부터 귤의 산출지를 확대해보려는 정책 추진의 성공적 결과라고도 하겠다.

귤이 조선 초기부터 제주 이외의 지역에서도 산출됐다 손치더라도, 제주가 국내 유일의 감귤류 약초 산출지라는 위상이 흔들렸던 것은 아니다. 허준(許浚)의 ‘동의보감(東醫寶鑑)’은 제주 이외의 곳에서도 귤이 난다는 사실이 드러난 ‘세종실록지리지’보다 150여 년 뒤에 발간됐다. 그럼에도 허준은 ‘동의보감’에 ‘귤피’(橘皮)의 약리적 효능을 거론함과 아울러, 약초로 쓰는 것은 오직 제주에서 나는 감귤에 국한된다는 점을 분명히 밝혀놓고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서도 약재(藥材)로 분류·등재된 것은 오직 제주 산출의 감귤류에 한정되고 있다. 반면 동래, 순천, 고흥에서 나는 귤은 토공이나 혹은 토산 가운데 하나로 거론되고 있을 뿐 약재의 품목으로는 올라가지 않았다.

귤이 제주 이외의 곳에서도 산출되더라도 한의약의 약초로는 오직 제주의 귤만을 썼다는 것이다. 이렇게 된 데는 제주의 자연환경적 여건이 크게 작용했다고 봐야 한다. 이는 제주에서 감귤류 나무가 자라기 시작한 내력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통상 식용작물은 거의가 자생종에서 시작해서 사람들에 의해 관리·개량되는 과정을 거친다. 현재도 제주에서 자라는 감귤류 나무의 원시식물은 약 300만년 전에 자생했고 원생지는 인도 동북부의 아삼 지역과 중국 동남부 운남 지역이었다. 특히 온주밀감류 나무는 애초의 원생지가 중국 동남부 윈저우(溫州) 지역이고 그 때문에 온주라는 이름도 붙여진 뒤 일본으로 건너가고 이어 변이를 일으켜 1910년 경 제주로 들어왔다고 본다.

하여간 제주 감귤류 나무의 원시식물은 인도로부터 중국 중남부와 인도차이나 반도에 걸친 지역, 곧 아시아대륙 동남부와 그 주변 섬 지역에 분포한다. 이로 볼 때 제주의 첫 감귤류 나무는 자생종으로 선사시대부터 자라고 있었을 것이다. 이때의 감귤류 나무는 인도의 아삼 지역 등으로부터 감귤 종자가 바다로 유입돼 떠다니다가 제주를 스치고 지나가는 ‘쿠로시오 해류’를 타고 제주에 들어온 뒤 최저온도가 -7도 이하로 내려가지 않은 제주의 온난한 기후에 힘입어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웠다고 하겠다.

현재도 먼 남방 지역의 열대·아열대 식물이 해류를 타고 떠다니다가 제주에 닿는 경우가 종종 있듯이, 감귤류 나무도 자생종으로 선사시대부터 제주에 자라고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

제주는 감귤류 나무가 서식하기에 적합한 지리적 위치와 기후조건을 갖춘 지역이다. 그래서 아주 오랜 시기부터 감귤류 나무가 자라날 수 있었다. 더욱이 국내의 어느 지역보다도 당도가 높은 감귤 알맹이가 맺었다. 이렇게 된 데는 제주의 온난한 기후와 아울러 염분(鹽分)을 머금은 바다와 접한 지리적 위치도 크게 작용한 것이다. 이는 중국에서도 당도가 가장 높은 귤은 바다와 접한 차오저우(潮州)에서 나왔다는 점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한편 ‘귤피’는 당도가 높은 감귤의 껍질을 최상품으로 친다. 제주 감귤은 알맹이가 국내의 어느 지역 것보다도 맛있던 터라 그 ‘귤피”의 약리적 효과가 뛰어남을 인정받게 됐고 유일하게 약초로서 거론됐다고 하겠다.

 

김태윤 한의학 박사·(재)제주한의약연구원 이사장

▲감(柑)과 귤(橘)의 껍질인 귤피-동정귤은 언제부터 귤의 대표 주자가 됐을까?

기원전 기록을 보면, ‘산해경(山海經)’에는 “둥팅산(洞庭山)에 귤나무가 많다”고 한다. 굴원(屈原)도 “천지간 아름다운 나무, 귤이 내려왔구나 (后皇嘉樹 橘徠服兮)/ 성품은 바꿔지질 않아, 강남에만 자라네 (受命不遷 生南國兮)”라고 ‘귤송(橘頌)’의 시작머리에서 읊었다. 굴원의 경우는 둥팅후(洞庭湖) 부근에 살면서 시를 썼는데, 그 내용이 후대에 꾸준히 영향을 미쳤다.

3세기 부현(傅玄)은 “굴원이 주귤을 보고 충신의 도리를 노래했다(屈平見朱橘而申直臣之志)”고 하듯이, ‘귤송’에서 얘기한 동정귤을 주귤이라 칭하고 있다.

9세기에 와서는 백거이(白居易) 등이 ‘동정귤’을 시의 소재로 많이 삼았다. 11세기 정해(鄭獬)도 ‘동정귤’을 노래했다. 이들 귤 관련 시가 소동파의 ‘동다송(東茶頌)’ 및 ‘동정춘색부(洞庭春色賦)’ 이래 계속 사람들의 인식에 영향을 끼쳤거니와, 아직도 계속 동정귤과 주귤이 혼용되면서 일컬어지고 있는 것이다.

반면 우리나라는 기록에서 ‘주귤’ 관련 사실을 찾아볼 수 없고 오직 ‘동정귤’만이 고려 때부터 확인된다. 조선시대 와서는, 문종이 “향기롭고 달아서 최고로 사랑하는 동정귤(最愛洞庭橘 香鼻又甘口)”이라는 시를 쓴 것을 비롯해 상당수의 역대 왕이 동정귤을 예찬하는 시를 남겼다.

또한 동정귤은 12월 종묘제사 때 천신품목(薦新品目), 곧 제수에 들어갔고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에는 진상 기록도 보인다. 심지어 ‘황감제(黃柑製)’가 1564년 명종 때부터 시행되고, 그것이 300여 년간 지속됐다. 이는 진상된 동정귤 등의 산물(酸物)을 성균관 유생들에게 나눠준 것을 기화로 과거를 치르게 했던 일로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사실이다.

동정귤은 잘 익으면 주홍색을 띠기에 ‘주귤’이라고도 불려왔던 것이다. 중국은 동정귤의 재배역사가 유구하고 전통적 우량종이었다. 옛적에는 동정홍(洞庭紅), 오늘날에 와서는 동정홍귤(洞庭紅橘)이라 일컫는다. 제주어로 ‘맛’, 곧 ‘단맛’이 난다해 ‘진귤’이라고도 한다.

동정귤은 기원전부터 둥팅후에 있는 둥팅산에서 난 이후 동정귤 또는 주귤이라 일컬어졌고 아직도 귤의 대표적 품종으로 회자되고 있는 것이다.

한편 현재도 동정귤이 제주에서 자라고 있다. 이를 살펴봤는데, ‘동의보감’에서 거론되고 있는 것과는 꽤 다르다. 이와 관련해서는 좀 더 검토가 있어야 할 것이다.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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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전 2016-12-21 14:31:07
100여년전 지금 제주는 귤이 자생지가 아니었다고 앎니다.
지금 제주는 일본애들이 왜곡시킨 지명이기에 당연하다고 봅니다.
여기가 조선시대 때 제주가 아니기에 당연 제주 특산품 귤은 다른 곳 진짜 제주(중국지역, 탐라와 제주는 전혀 같은 곳 아니고요!)에서 갔다는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