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판 ‘라스푸틴’
한국판 ‘라스푸틴’
  • 뉴제주일보
  • 승인 2016.11.09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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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관후. 작가 / 칼럼니스트

[제주일보] “어머니는 돌아가신 게 아니라 너의 시대를 열어주기 위해 길을 비켜주었다는 것, 네가 왜 모르느냐. 너를 한국, 나아가 아시아의 지도자로 키우기 위해 자리만 옮겼을 뿐이다. 어머니 목소리가 듣고 싶을 때 나를 통하면 항상 들을 수 있다. 육 여사가 꿈에 나타나 ‘내 딸이 우매해 아무것도 모르고 슬퍼만 한다’면서 ‘이런 뜻을 전해 달라’고 했다.”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하며 하루하루 보내던 박근혜에게 눈에 띄는 편지가 도착한다. 최태민이 보낸 편지였다. 박근혜와 최태민의 첫 만남은 1975년 3월 6일 청와대에서 이뤄졌다. 최태민은 3시간이 넘는 대화 끝에 박근혜의 신뢰를 얻는 데 성공했다.

최근 미국의 워싱턴포스트(WP)는 최태민을 ‘한국의 라스푸틴’으로 불린다는 과거 주한 미국대사관의 보고 사실을 거론했다.

또 AFP통신과 AP통신은 최순실을 ‘한국의 여성 라스푸틴’으로 표현했다. 외국의 유수언론들이 최태민과 그의 딸 최순실을 라스푸틴(Grigorii Efimovich Raspu’tin, 1872~1916)이라 칭하면서 라스푸틴이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또 외신들은 샤머니즘적 숭배와 연관된 스캔들의 소용돌이가 한국 대통령을 위협하고 있다고 연일 보도하고 있다.

그리고 외신들은 최순실의 국정 개입 사건이 ‘샤머니즘적 주술’과 연관되어 있다, 최순실의 아버지이자 사이비종교 교주인 최태민은 수차례 개종하고 이름을 일곱 번 바꾸었다, 여섯 번 결혼했다 등등의 내용을 다루고 있다.

물론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은 힘든 시절을 같이 보냈다. 그래서 각별하다는 건 맞는 말인지 모른다. 여기에 바로 ‘주술적인 것, 샤머니즘적인 것’이 도사리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최태민이 무슨 말만 하면 이성을 잃을 정도로 반응을 보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최순실은 최태민의 후계자가 아닌가?

또 뉴욕타임스(NYT)는 최순실 게이트를 ‘샤머니즘적 컬트’라고 규정했다. 최태민을 19세기 말~20세기 초 제정(帝政)러시아 니콜라이 2세를 허수아비로 만든 파계(破戒) 성직자 라스푸틴을 바로 연상시킨다며, 이들에게 놀아난 박근혜 대통령 역시 한국의 라스푸틴이라는 결론이다.

그럼 라스푸틴은 누구인가?

그는 시베리아의 농민 출신으로 말을 훔치다가 마을에서 쫓겨난 후 수도원을 전전하는 ‘돌중’이 됐다.

그는 1904년에 페테르부르크로 넘어와 귀부인들 사이에서 많은 신도를 얻었고, 마침내 니콜라이 2세와 황후 알렉산드라까지도 사로잡았다.

황후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은 라스푸틴은 막강한 권세까지 얻었다. 심약한 니콜라이 2세는 매사를 대가 센 아내의 뜻에 따랐고, 황후는 매사 라스푸틴에게 자문을 구했다. 라스푸틴은 황후와 황제에게 ‘우리의 친구’가 됐다.

1910년경 라스푸틴에 관한 얘기가 신문에까지 보도되면서 그를 질타하는 소리가 높아갔다. 그는 귀부인들에게 ‘육체의 속죄’를 통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설교하며 숱한 여성들을 농락했다. 라스푸틴의 권세는 하늘을 찔렀다. 모두들 황후와 라스푸틴에 대해서 뒤에서만 수군거릴 뿐, 앞에서는 아무 말도 못했다.

1916년 가을, 위기가 깊어지면서 대중들의 시위가 날로 격해지고 병사들의 동요도 뚜렷해졌다. 자본가들 사이에 쿠데타 움직임이 싹트고, 황실과 귀족사회 한구석에서까지 황제를 퇴위시키고 니콜라이 대공을 옹립하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위기를 느낀 황실 측근들은 라스푸틴을 죽여 황실을 구하고자 했다. 1917년에 접어들면서 페트로그라드에서는 연일 파업과 시위가 계속됐다. 니콜라이 2세는 라스푸틴이 암살된 지 두 달 남짓 후 제위에서 쫓겨났고, 그로부터 1년 남짓 후 온 가족과 함께 살해 당했다.

앞으로 전개될 우리의 정치상황이 걱정스럽다.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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