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엽이 흐느끼는 가을
낙엽이 흐느끼는 가을
  • 제주일보
  • 승인 2016.11.08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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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훈식. 제주도문인협회 회장

낙엽은 등 시린 풀벌레의 다락방이며 봄의 씨앗을 덮는 이불인 줄 배워서 알았고 느껴서 알았다. 목초지를 찾아 떠나는 누 떼처럼 청둥오리도 떼 지어 날아가면서 응원가를 부르는지 밤공기가 물결친다.

감기 걸리기 딱 좋은 바람이 옷깃을 흔든다. 어차피 오는 가을, 그리고 겨울, 이 나이가 되도록 도대체 무엇을 했기에 아직도 현역인가?

이대로 먼 길을 떠나야 한다고 가정해 보니 남길 것이 별로 없어 그리 아쉬울 것은 없겠는데 어디서 왔는지 몰라도 어디로 가는지는 알고 싶다. 그렇다고 유행가 가사처럼 한 치 앞도 모르는 인생이라고 자탄하기는 그렇다.

벌레에 먹힌 낙엽을 들고 있으니 심도 있는 사색을 해야 한다. 도대체(都大體)란 문제만 있고 답은 어디 있는지 미궁이라는 의미다. 어쩌면 문제만 있고 답이 없는 곳이 문학이다. 남들이 쓴 시를 읽어보면, 남들이 부르는 노래를 들어보면, 남들이 들려주는 말씀을 귀담아 보면 삶이 얼마나 팍팍했는지 측은지심이 절로 난다. 그래서 답은 간절히 소망하는 종교에 있다.

종교란 미지의 세상으로 가는 지도다. 이승이나 저승이 비슷하다고 하여 어차피(於此彼)라는 말을 쓴다. 어차피란 이곳이나 저곳이나 스스로는 어쩌지 못 한다는 의미다. 원하여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으니 또한 저 세상에 가야함도 어쩌지 못한다는 피동의 삶이라는 거다. 누구의 인생인들 다 결핍이다.

살림이 넉넉했다면 나는 되도록 많이 오만했을 것이다. 때로는 허기를 달래려고 굽실거리기도 했으니 사랑하지만 포기하면서, 피었다가 시들면서 그렇게 살아왔다.

어쩌면 바쁜 일상이라서 잠깐 간이역에 서성이는 미녀를 훔쳐보듯 꽃에만 관심을 쏟아 부은 것은 아닌지, 땡볕에 화상을 입으면서도 드디어 붉게 익은 열매를 따지도, 먹지도 못하고 이렇게 늙고 말았는가.

어차피 빼앗길 청춘이라서, 파충류 형상으로 늙었지만 손자에게 과자를 주었더니 위생 상 나쁘다고 느꼈는지 안 먹겠다고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이제 늙었으니 눈도 어안이다. 돋보기를 써야 한다는 의미다. 차마 발설하기는 뭐하지만 지금 만나는 사람은 전에 어디선가 많이 보았던 사람이다. 그래서 첫사랑보다 더 반갑다. 그러나 어기서 그러나는 나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도무지란 모른다는 사실을 통틀어도 모른다는 탄식이 짙게 배어 있다. 모른다는 화두를 붙잡으려고 횡설수설하고 있음이다.

전생을 전혀 몰라야 한다는 조건으로 아기는 태어난다. 간난 아기를 보면 눈이 어안처럼 부어있다. 떠날 때도 빈손으로 가야 한다고, 싱싱한 추억마저도 멀쩡한 거울을 냅다 던져서 깨뜨려서 반드시 기억상실증에 걸려야만 먼 길을 간다는 이 엄청난 사실과 더불어 나를 반기는 사람과 오늘 또 만나서 미소를 주고받을 것이지만 그가 전생에 누구였는지 안다면 기 막힐 거다. 아무도, 아무 것도 몰라서 이 가을은 막막하면서도 푸른 낙엽조차 아름답다.

제주일보 기자  hy0622@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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