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과 기건목사에게 길을 묻다
세종대왕과 기건목사에게 길을 묻다
  • 제주일보
  • 승인 2016.10.30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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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영택. 우도초·중학교 교장

나라가 기습한파 당하듯 움츠리고 벚꽃 지듯 어지럽다. 대통령에 대한 믿음과 기대가 허물어진 데서 오는 국민적 좌절감을 어떻게 치유해야 할지.

절해고도 제주에는 조선조 나라님들이 임명한 286명의 목사가 부임하는데 선정을 베푼 목민관 중 세종대왕이 제수(除授)한 기건목사가 떠오른다.

세종대왕이 언관(言官)인 기건을 제주목사로 제수하자, 여러 신하들이 반대상소를 올린다.

좌정언(左正言) 윤면이 ‘언관을 외직(外職)에 보하는 것은 전례가 없사옵니다. 청하옵건데 고쳐 제수하소서(이하 청‧고‧제 하소서)’하니, 대왕께서 ‘너희들이 후일의 폐해를 염려하여 그러는 것이니, 이후로는 내가 마땅히 잘 생각하겠다’고 하였다. 다음 날에도 장령(掌令) 조자(趙孜)가 ‘언관은 반드시 과실이 있어야 외임에 보직하거나 좌천하는 것인데, 기건은 과오가 없는 데도 제주목사가 되었사오니, 청‧고‧제 하소서’하니 ‘너희들이 옳다. 그러나 언관도 사람 크기가 상당하면 외임에 제수하는 것도 불가할 것이 없을 것이다’라고 답했다. 조자가 다시 ‘제주에는 반드시 무재(武才)와 이재(吏才)가 겸한 자라야 임무를 감당할 것인데, 기건은 이재만 있고 무략(武略)은 없사오니 청‧고‧제 하시고, 이제부터는 죄과가 없으면 외임에 보직하지 말게 하소서’ 하니 ‘어찌 고쳐 제수하겠느냐. 언관을 외임에 임용하지 말라는 것은 내가 장차 생각하겠다’라고 하였다.

임금과 신하의 격의 없는 소통과정을 거친 후 기건(奇虔)은 1443년 12월부터 2년간 제주목사로 근무한다.

기건목사는 세종대왕의 기대 이상으로 선정을 베푼 듯하다.

당시 제주에는 문둥병이 창궐하여 죽어가는 이들이 많았다. 이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여 피해를 조기에 최소화한 목민행정은 다음과 같다.

기건이 순행하다가 바닷가 바위 밑에서 신음소리가 들려 가보니, 나병을 앓는 자 100여 명이 널려 있었다. 남녀를 따로 거처하게 한 후 고삼원(苦蔘元)을 먹이고 바닷물에 목욕을 시켜 고치니 그가 돌아갈 때 백성들이 울면서 보냈다 한다.

기건은 제주 백성들이 전복 바치는 것을 괴롭게 여겨 먹지 않았으며, 매장 풍습도 바르게 깨우치게 했다. 당시 제주에서는 사람이 70세 이전에 죽으면 바닷가나 개천 등지에 두었고, 70세가 되면 신선이 되리라 여겨 어버이를 한라산으로 모셔갔다는 설화가 전해져 내려온다.

한라산 정상에 음식을 차려놓고 어버이를 앉혀두면 신선이 되어 올라간다고 여겼던 것이다. 어느 날 이방이 ‘내일은 아버님이 신선이 되는 날이라 일을 보지 못하겠습니다’고 말하자 목사는 자세한 내력을 듣고는 지필묵으로 쓴 밀봉된 편지를 이방에게 전해 주었다.

며칠 후 이방이 등청하자 옥황상제에게 보내는 편지를 전달했는지를 물었다. 분부대로 했다고 하자, 확인 차 이방과 같이 목사는 한라산으로 올라갔다. 이럴 수가! 신선이 된다고 믿고 아버지를 앉혀 둔 자리엔 커다란 뱀이 죽어 있는 게 아닌가. 목사가 배를 가르니 뱀의 배 속에는 이방 아버지의 시신이 들어있었다. “이방, 내 옥황상제에게 보낸 편지는 독약이었네. 신선이 된다고 해서 이곳에 두고 간 노인들은 모두 뱀이 잡아먹었던 것이네. 이래도 신선이 되어 올라간다는 말을 믿겠는가?”. 원통하고 분한 이방은 그제야 자신의 무지함을 깨달았다.

이 소문은 삽시간에 온 섬에 퍼졌고, 이후 70세가 넘은 노인을 한라산에 버리는 풍속이 없어졌으며 70세 이전에 죽은 시체도 매장하는 법이 생겼다고 한다.

목민관이 걸어야 할 길을 세종대왕과 기건목사에게서 엿보았다. 성현들이 이르길, 청렴하고 절개를 지키는 것이 정(貞)이고, 백성에게 모범을 보여 복종시키는 것이 무(武)라 한다. 임금이 내린 기건목사의 시호(諡號)는 정무(貞武)였다.

제주일보 기자  hy0622@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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