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숨
물숨
  • 김종배 상임 논설고문
  • 승인 2016.10.09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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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일보=김종배기자] ‘물숨’은 결코 가벼운 다큐 영화가 아니었다. 어릴 적 불턱 옆 담벼락에 걸쳐놓은 어머니의 물소중이를 내리다가 손가락을 다쳐 기형의 엄지를 달고 있는 필자에게 물숨은 가슴아픈 이야기였다. 왜 내 엄지 손가락에서는 손톱이 두 개가 나오게 됐는지는 너무 오래된 일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어릴적에는 그게 부끄러워 두 개 손톱 가운데 짧은 것을 밑둥까지 잘랐다가 피가 나고 아린 적이 많았다.

어머니가 들려주는 먼 시절의 얘기를 통해 제주시 묵은성 탑바래의 기억들이 살아나면 소금기가 가득했던 바다 냄새가 그리워진다. 지금은 흔적조차 사라져 버린 오리엔탈호텔 건너 슬레이트 집은 전복죽 식당의 주차장으로 변했고 한때 물질로 살림을 보탰던 어머니의 물소중이도 덩달아 사라졌다. 그런 탑바래의 삶 36년에서 늘상 보았던 것은 보재기와 잠녀들이었고 조부와 함께 드나들었던 도두동 제삿집의 단골화제는 그날의 어획물과 어황일 정도로 바다는 항상 곁에 있었다.

아내 역시 한림읍 옹포리의 궁핍한 생활로 진학을 포기하고 새끼 해녀질을 했다. 그런 필자에게 영화 ‘물숨’은 까맣게 잊었던 고향의 안부(安否)처럼 다가왔고, 개봉소식에 아내와 함께 극장을 찾았다. 우리 말고도 햇볕에 검게 그을린 얼굴에 흰 분을 곱게 바른 해녀로 보임직한 여자들도 있었다. 처음부터 숨죽여 본 ‘물숨’은 아내를 울렸고 나도 울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

해녀들이 바다 물속에서 숨을 참다 참다가 끊어지기 직전에 수면 위로 올라와 토해내는 소리가 숨비소리이다. 흡사 한 마리의 물짐승이 내짖는 듯한 처연한 소리는 해녀들이 작업하는 곳이면 어디서든 들을 수 있다. 그건, 봄날 짙은 어둠 속이나 그 어스름이 서서히 걷힐 새벽 즈음에 한라산 숲속 어딘가에서 들었던 호랑직바구리 귀신새의 소리와도 같다.

그게 숨비라면 물 밖에서가 아니라 물 속에서 내쉬는 마지막 숨이 물숨이다. 물숨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이르는 죽음의 숨이다. 해녀들은 물숨을 마지막으로 쉬고 바다에서 죽는다.

영화 ‘물숨’은 제주출신 고희영 작가와 역시 제주출신으로서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와 ‘모래시계’를 쓴 송지나 작가가 잠수마을 우도에서 6년간 머물면서 해녀들의 처절한 삶을 담아낸 작품이다. 보기드문 수작(秀作)이다. 그동안 해녀들을 다룬 영화가 많았지만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항상 불편했다. 영화 ‘물숨’은 주관자가 아니라, 뒤로 한 발 물러서 여과없이 보여준 영화였기에 보는 이의 가슴이 먹먹하다. 이처럼 보재기의 아들인 필자와 새끼 해녀였던 필자의 아내를 울린 해녀영화가 언제 있었을까.

 

욕심은 뭍에도 있다

해녀의 숨은 선천적이며 숨의 길이는 정해져 있다고 한다. 그러기에 아무리 노력해도 늘어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해녀라면 누구나 남보다 더 빨리, 더 많이 채취하기 위해 자신이 지닌 숨의 길이를 넘어서는 일에 부닺치게 된다. 욕망을 스스로 다스리지 못하고 자신의 숨, 죽음의 경계를 넘어서는 순간 해녀는 이승의 밥이 된다. 숨이 턱까지 다달아 수면 위로 올라오는 바로 그 순간에 보이는 바닷속 큰 물건에 대한 욕심을 버리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첫 물질에 뛰어든 새끼 해녀에게는 ‘물숨’을 조심하라는 당부가 따라 다닌다. 그래서 해녀들은 자신에게나, 동료에게나, 새끼해녀에게나 “욕심내지 말고 숨 만큼만 따라”한다.

영화 ‘물숨’에서도 80이 넘은 우도의 노(老) 해녀가 물숨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차가운 바다에 가라 앉는다. 바다는 밭이며 삶의 터전이지만 욕망에 사로잡혀 물숨을 먹는 순간 목숨까지 내놓아야 한다. 그 욕망을 다스릴 때에만 바다는 넉넉한 품이 된다.

우리 인생도 그러하다. 요즘 정치권을 보면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물숨의 경계를 오가는 이들이 너무 많다. 물숨은 호흡이며 호흡은 유연한 리듬이다. 국가와 지방정부도, 그리고 정치권도 개인의 욕심을 툴툴 턴 유연한 사고(思考)와 리듬이 필요하다. 물숨은 뭍에도 존재한다.

김종배 상임 논설고문  jongbae10@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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