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식 겸손과 미국식 자기PR
한국식 겸손과 미국식 자기PR
  • 뉴제주일보
  • 승인 2016.07.20 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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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완 제주대학교 철학과 교수

[제주일보] ‘자기PR시대’라는 말은 이제 식상하다. 초·중등교육에서는 물론 고등 교육기관인 대학에서마저도 인간의 정신세계를 풍부하게 만드는 것보다는 자기를 드러내는 법에 매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인간의 정신세계를 풍부하게 만드는 것은 의사소통하는 과정에서 이뤄지는 것이기 때문에 동서고금 할 것 없이 그 중요성을 강조해 왔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의사소통에서 ‘자기’가 강조되면서 ‘한국식 겸손의 미덕보다는 미국식 자기PR이 낫다’는 말을 금과옥조처럼 여기게 됐다.

지금 우리는 더 이상 ‘자기’라고 내세울 것이 없을 정도로 익명의 대중들에게 자신을 무차별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그 결과가 요즘 연이어 터지는 ‘막말의 향연’이라면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잘못 접근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정치인의 막말은 ‘자신의 부고기사 말고는 모든 기사를 좋아한다’는 말을 생각해보면 그 의도를 쉽게 파악할 수 있다. 막말이라도 해서 세상 사람들의 관심을 붙잡아두고 싶은 것이다. 물론 막말하는 정치인들도 안다. 단 한 번이라도 그 막말 때문에 영영 잊힐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잊히지 않기 위해서 영영 잊힐 지 모를 선택을 해야 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아도 기구한 운명이다.

문제는 이 기구한 운명이 정치인에게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것이라는 데 있다. 자신을 드러내어서 자신에게 관심이 집중되는 바로 그 순간이 사실은 가장 자신을 잃어버리기 쉬운 때이다. ‘한국식 겸손’이라는 것이 실제로 있다면 이러한 운명을 체득한 결과일 것이다.

논어(論語) ‘공야장(公冶長)’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실려 있다. 누군가 “옹(雍)이 어질기는(仁) 해도 말재주가 없습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공자께서는 “말재주를 어디다 쓰겠다는 말인가? 구변이 좋아 남의 말을 막다 보면 미움을 사는 일만 늘어날 뿐이다. 그가 어진지는 모르겠지만 말재주를 어디다 쓰겠다는 말인가?”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거론된 염옹(冉雍)의 자(字)는 중궁(仲弓)으로 공자보다 29세 연하의 제자이다. 그는 미천한 출신이어서 말을 세련되게 하지 못한다는 약점이 있었다. 그래서 공자도 그를 가리켜 “얼룩소 새끼라도 색깔이 붉고 뿔이 반듯하면 쓰이지 않으려고 해도 산천이 가만히 놔두겠는가?”라고 평가한 일이 있는데 미천한 출신이지만 사람은 반듯하다고 본 것이다(‘옹야’).

공자는 미천한 출신이라 고상하게 말하지 못한다는 약점을 잡힌 제자를 위해 ‘말재주(佞) 따위는 어디 쓰겠느냐’고 항변한다. 대화를 독점하다보면 상대로부터 미움 받는 일이 많아질 것이라는 점도 주의환기 시킨다. 그런데 의관을 갖추지 않고 접대한 자상백자(子桑伯子)를 공자가 ‘소탈한 면은 쓸 만하더구나’라고 평가하자 염옹은 이렇게 되묻는다. “자신은 예의범절을 지키면서도 다른 사람에게는 소탈하게 대하는 식으로 백성을 다스린다면 그렇다고 하겠지만 자기에게나 남에게 모두 소탈하게 대한다면 너무 소탈한 것이 아닌지요?” 이 말 덕분에 염옹은 공자로부터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갖췄다고 평가 받았고 맹자와 자사를 비판했던 순자로부터도 높이 평가받았다.

‘한국식 겸손’이든 ‘미국식 자기PR’이든 의사소통에는 나와 남의 관계가 전제돼 있다. 그래서 요즘에는 “바람직한 대화가 이루어지려면 기본적으로 대화 상황을 잘 분석해 상황에 적합하게 말해야 하고 자기 중심적으로 되려는 욕구를 조절해 상대방의 욕구도 충족시킬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막말’의 상대어는 세련되고 그럴 듯하게 꾸민 말을 뜻하는 ‘교언(巧言)’이나 다른 사람이 말할 틈을 주지 않는 ‘말재주(佞)’가 아니다. 유학의 전통에서는 책임질 수 있는 말을 ‘참된 것(誠)’이라고 했고 통제되지 않은 말을 ‘잃어버린 말(失言)’이라고 경계했다. 오늘날 우리는 말뿐만 아니라 SNS에 올리는 글은 물론 의도치 않게 CCTV에 찍히는 영상까지 걱정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자신이 주목받는 방법을 배우기보다는 오히려 ‘한국식 겸손’을 배워야 할 때라는 말이다.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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