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간도 아닌 요즘 부쩍 이사하는 분들의 장서 정리 문의가 늘었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육지에서 왔다가 다시 나가시는 분들이 다수를 점한다. 그 중에는 장서가 1000권 단위를 넘는 분들도 종종 있어서 때 아닌 중노동(?)에 시달리기에 몸은 힘들지만 좋은 책들을 나눠주심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장서가 많은 이주민 분들은 대개 기존의 장서를 대폭 정리하고 꼭 필요한 책만 가지고 오시지만 워낙 책을 좋아하시는 분들인 관계로 금방 원상회복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 까닭에 이런저런 사정으로 다시 육지로 되돌아 갈 때는 마찬가지로 대폭 정리를 하고 떠나시기 마련이다.
그렇게 인수해 온 책들을 정리하다 보면 그 댁의 다른 책들과는 사뭇 분위기가 다른 게 함께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얼마 전 인수해 온 댁의 장서 가운데도 그런 책이 있었다. 대부분 엄숙한 서적들로 구성된 책들 가운데 뜬금없는 만화책이 한 권 포함돼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귀한 작품이기에 오늘은 그 책을 소개해 보련다.
바로 만화가 이두호(1943~) 화백의 ‘이두호의 가라사대’(행복한만화가게 2008)이다. 이 책은 오래 전 한 월간지에 수록했던 작가의 작품을 수정하고 추가로 새로 그려서 2007년 만화잡지 ‘팝툰’에 다시 연재했던 8~16쪽 짜리 단편 만화 21편을 묶는 만화집이다.
작가는 늘 ‘마감 시간에 쫓기는 연재만화의 특성상’ ‘흰 종이에 펜과 먹이라는 도구의 제한과 흑백 인쇄라는 기술의 틀(한계)’을 벗어나기 어려웠던 현실적인 문제를 인식하고 이에 여러 가지 도구와 재료를 사용해 새로운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음을 실험하고자 했고 그 결과물이 바로 이 작품집임을 밝히고 있다.
또한 선생은 ‘오랜 시간 만화를 그려오면서 마음 한 구석 허전하고 아쉬웠던’ ‘가려운 곳을 메워 주고 긁어준’ 게 바로 이 작품이라 고백하면서도 이 또한 ‘연재만화의 특성’을 완전하게 극복하지 못하고 ‘실험’이라는 마음의 원칙을 지키지 못해서 ‘미완(未完)의 실험’작에 머물게 된 것을 못내 아쉬워하고 있다.
1980년대부터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민초(民草)들의 삶을 그만의 독특한 화풍으로 표현하는 시대극 만화 창작을 고집했기에 ‘바지저고리 만화가’, ‘조선의 혼’이라는 타이틀이 붙었던 선생이었다. ‘모르는 것은 그릴 수 없다’며 철저한 고증을 통해서 알아낸 것만 그릴 수 있기에 조선 시대를 벗어날 수 없었다는 그 고집스러움과 ‘만화는 엉덩이로 그린다’는 또 다른 그의 지론이야말로 세간으로부터 선생이 ‘조선 시대 극화의 거장’으로 평가 받게 된 원동력일 것이다.
선생과 함께 1997년 청소년보호법 파동을 함께 겪었던 만화가 이현세는 ‘만화가들은 오랫동안 표현의 자유에 대해 억압당하면서 투쟁해’ 왔다면서 이 작품집을 ‘간단하지만 가볍지 않고 짧지만 긴 울림’이 있다고 평가하고 기성세대의 고정관념을 뛰어넘어 후배들은 ‘열린 세상에서 표현의 자유를 누리며 작업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추천의 변(KTV라디오 ‘대통령의 서재’)을 밝히기도 했다.
이 책만이 가진 다양한 표현방식을 알아차리시는 순간 ‘한국만화 최초의 실험과 도전’이라는 출판사의 홍보 문구가 전혀 손색없음에 동의하실 것이다. 절판되어 지금은 보기 드문 책이라는 게 그저 아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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