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의 역사·사연 잃지 않고 곡진하게 기억하는 마을
아픔의 역사·사연 잃지 않고 곡진하게 기억하는 마을
  • 뉴제주일보
  • 승인 2024.03.18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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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제주 남원 의귀마을 4·3길 1코스(3)
당시 무덤이 그대로 남아 있는 김만일 묘역
잘 다듬어진 현의합장묘 4·3 위령공원
비(碑) 뒷면에 새겨진 그간 일어났던 사연 뭉클
안내문 지워지는 등 정돈 안 된 송령이골 아쉬움
헌마공신 김만일 묘역

■ 헌마공신 김만일 묘역

무밭을 지나 오른쪽으로 구부러진 길을 걸어 트인 곳까지 나왔는데 묘역을 알리는 아무 표지도 없다. 마침 옆에 김매는 아주머니에게 물어봤더니 오른쪽으로 조금 더 가라 한다. 가보니 무덤 앞에 문화재임을 알리는 안내판이 서 있다.

헌마공신으로 종1품 숭정대부까지 올랐고 후손들도 오랫동안 감목관을 했다고 하면 묘역을 그럴 듯하게 꾸밀 법 한데도 당시의 무덤 그대로 있다. 생각해 보면 당시의 무덤이 그대로 온전히 남아 있기 때문에 문화재가 된 것이다. ‘의귀리 김만일 묘역(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65호)’은 비교적 정확한 축조시기를 알 수 있어 17세기 제주분묘의 산담과 봉분의 축조양식 및 구조를 파악할 수 있는 자료라고 했다.

묘역 내에는 동일시기로 추정되는 봉분 1기, 혼유석(魂遊石) 1기, 비석 1기, 문인석 2기 등이 있는데, 문인석은 돌하르방과 같은 형태의 제주형으로 제주 고유의 석물문화를 밝히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산담의 규모는 동서 9.3m, 남북 13.3m이고, 직경 5.4m, 높이 1.5m에 이르러 직경이 3m 내외인 일반 무덤보다 그 규모가 크다.

현의합장묘역 4.3위령공원 표지석.
현의합장묘역 4.3위령공원 표지석.

■ 현의합장묘 4·3 위령공원

김만일 묘역에서 나와 안내판과 리본의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주변을 살피며 현의합장묘역에 이르렀다. 돌담을 두르고 잘 다듬은 공원 입구에는 커다란 자연석에 ‘현의합장묘 4․3 위령공원(顯義合葬墓 四․三慰靈公園)’이라 한자로 새겼다. 안내판에는 ‘4․3 당시 의귀초등학교 동녘 밭에서 학살당한 주민 80여 명의 시신을 현의합장묘 옛터에 임시 매장했던 것을 2003년 9월 20일 이곳으로 옮겨 안장해, 해마다 음력 8월 24일에 위령제를 봉행하고 있다.’고 썼다.

옷깃을 여미고 묘역으로 천천히 들어가 세 봉분 앞 제상 뒤에 위패처럼 세워 놓은 비(碑) 뒷면을 살핀다. 그간에 일어났던 사연과 바람을 곡진하게도 새겼다.

‘유난히 매섭고 시렸던 무자․기축년 그 겨울 곰도 범도 무서워 잔뜩 웅크려 지내면서도 따뜻한 봄날 오려니 했더이다. 아 그랬는데… 거동 불편한 하르방 할망, 꽃다운 젊은이들, 이름조차 호적부에 올리지 못 한 물애기까지 악독한 총칼 앞에 원통하게 스러져 갔나이다. 허공 중에 흩어진 영혼, 짓이겨져 뒤엉킨 육신 제대로 감장하지 못 한 불효 천년을 간다는데 무시로 도지는 설움 앞에 행여, 누가 들을까 울음조차 속으로만 삼키던 무정한 세월이여! ‘살암시난 살아져라’ 위안삼아 버틴 세월이여! 앙상한 어웍밭 방앳불 질러 죽이고 태웠어도 뿌리까지 다 태워 없애진 못하는 법 아닙니까. 봄이면 희망처럼 삐죽이 새순 돋지 않던가요. 참혹한 시절일랑 제발 다시 오지 말라 빌고 빌며 뒤틀린 모진 역사 부채로 물려줄 수는 없다며 봉분 다지고 잔디 입혀 해원의 빗돌 세우나니, 여기 발걸음 한 이들이여! 잠시 옷깃을 여미어 한 가닥 평화와 인권의 소중함 보듬고 가신다면 헛된 죽음 아니라 부활하는 새 생명이겠나이다. -서기 2004년 10월 7일’

그리고 한쪽 편에 ‘현의합장묘 내력’, ‘희생된 넋들(명단)’, ‘현의합장묘 4․3유족회’, 이곳 묘역 공원을 기획하고 도운 분들의 이름을 새겼다. 그들은 공간 구상과 묘비 도안을 한 박경훈, 비명 글씨를 쓴 신창규, 비문을 지은 강덕환, 내력을 밝힌 김동윤이다.

송령이골 묘역.
송령이골 묘역.

■ 송령이골

현의합장묘에서 나와 이번에는 남쪽으로 이어진 시멘트 포장길을 걸어 중산간동로(1136)에 이른다. 거기서 서쪽으로 가다 보면 남쪽 길목에 ‘송령이골 가는 길 900m’라 쓰인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그곳 한신로 143번길을 걸어가면 바로 길가에 위치해 있다.

안내판에는 ‘이곳은 4․3 당시 의귀초등학교에서 사망한 무장대의 시신이 묻힌 곳이다. 1949년 1월 12일 새벽, 무장대는 학교에 주둔한 부대를 공격했으나 2시간 여의 전투에서 51명의 사망자를 내고 퇴각했다. 이 때 사망한 무장대 시신은 학교 뒷밭에 흙만 대충 덮인 채로 방치되었다가 그 해 봄 토벌대의 지시에 의해 이곳으로 옮겨져 매장되었다. 일부 시신은 가족이 찾아간 경우도 있으나 다수의 시신은 세 개의 구덩이에 매장된 채 현재에 이르고 있다. 2004년 생명평화 탁발순례단, 4․3연구소, 현의합장묘 4․3유족회 등이 생명의 존엄과 화해와 상생의 가치를 담아 천도재를 지냈고, 그 후 몇몇 사회단체에서 매년 8월 15일에 벌초를 하고 있다.’라고 했다.

묘역은 꽤 넓은데 원래 있던 무덤과 행사 때 심은 나무들, 생명평화 탁발순례단에서 나무를 엮어 세운 다 지워져 가는 안내문 등이 잘 정돈되지 않은 상태로 있다. 취재를 마치고 마을로 돌아오는데 어느 뜻있는 분이 널빤지에 새겨 세운 시구가 자꾸 눈에 밟힌다. ‘속냉이골, 비록 반 분단 민족 자주의 염원 처연히 묻혔으나, 기필코 일어나 통일의 한 하늘에서 대륙의 거대한 기지개 펴리라’. <계속>

<김창집 본사 객원 大기자>

의귀마을 진입로 4.3길.
의귀마을 진입로 4.3길.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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