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과 견생
인생과 견생
  • 뉴제주일보
  • 승인 2024.03.10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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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애 동화 작가

공항에서 탑승을 기다리고 있었다. 젊은 부부가 내 옆에 와서 앉았다. 부부는 각자 강아지가 담긴 가방을 들고 있었다. 고개를 빼꼼 내민 강아지들이 시선을 끈다. 

남편의 강아지는 안경을 끼고 있었고 아내의 강아지는 와이셔츠에 빨간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자꾸만 눈이 갔다. 흘끔거리는 내 시선을 느꼈는지 젊은 여자는 마치 어린 아들에게 말하듯 강아지의 머리를 나에게 숙여 보이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해야지. 괜히 머쓱해서 강아지가 예쁘다고 말해주었더니 매우 흡족한 표정이다. 영락없이 두 자녀를 둔 젊은 부모의 모습이다. 

애지중지 키워도 내 맘대로 안 되는 게 자식이니 차라리 무자식 상팔자로 살자. 그래도 공허하다. 정을 나눌 대상이 필요하다. 그런 사람들의 삶 속에 애완견은 훌륭한 대안이 된 듯하다.

내가 바라보는 너는 눈이 다른 곳을 향해 있고 절친인가 했더니 돌아서서 뒤통수 치고 고생고생하며 자식 키웠더니 제 잘난 줄만 아는 이 팍팍한 세상에서 개 말고 누가 나를 한결같이 재롱떨며 반겨줄까. 

어떤 사람이 친한 친구에게서 키우던 개가 죽었다고 아무 날 아무 시에 장례를 치르니 장례식장에 와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좀 떨떠름하긴 했지만 친구에게는 슬픈 일이라 함께 해주는 것도 좋을 듯하여 장례식장을 찾았는데 조의금을 넣는 함이 있어서 난감했다. 얼른 봉투를 마련하여 조의금을 전했다 한다. 

정승집 개가 죽으면 문상객으로 문전성시를 이룬다는 건 어디까지나 염량세태를 풍자한 말일 뿐인데 이제는 문상은 가야 할 지 조의금은 얼마를 해야 할 지 고민하게 생겼다. 떠도는 이 이야기가 사실일까? 사실이라면 사람이 개를 문상하는 격이니 이상한 풍조이고 혹 꾸며낸 이야기라면 애완견의 지위가 인간과 동등해졌다는 반증일 것이다. 

오랜 시간 가족으로 살다가 이별을 맞이해야 하는 순간은 사람이나 개나 슬프긴 마찬가지다. 한낱 개일지라도 정을 듬뿍 주고받으며 살아온 존재를 어떻게 먼지처럼 털어내 버릴 수 있으랴. 애틋한 건 인지상정이다.

개의 사체는 생활폐기물로 분류가 되기 때문에 매장할 수 없고 쓰레기봉투에 담아서 버려야 한다고 한다. 가족과 같은 존재를 그렇게 버리기도 사실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생겨난 게 동물 장례식장인데 염도 하고 수의도 입혀서 장례를 치른다 한다. 비용도 적게는 몇 십만원 많게는 백만원 정도가 든다지만 각자 능력껏 알아서 하면 될 일이니 뭐라고 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부고를 전하는 건 좀 다른 문제다. 본인에겐 가족상 같아도 타인에게는 다를 터이니 가족끼리 조용히 보내주면 되지 않을까? 인생과 견생이 동급이라면 왠지 허무하고 슬퍼질 것 같아서 말이다. 유사 이래 세상을 다스린 개가 있던가? 도구를 발명하고 인류의 생활을 편리하게 해준 개가 있었나? 문자를 만들어 백성에게 가르친 개도 물론 없다. 그저 주인에게 충성을 다한 개 그 정도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뿐이다. 개는 개일 뿐이지 사람보다 존엄한 개는 없다.

그렇지만 베이비 박스에 버려지는 아기도 있는 게 엄연한 현실이고 보면 그야말로 견생보다 못한 인생이 수두룩할 판이다. 씁쓸하다. 아, 이러다가 김아무개의 자 김멍멍, 김멍돌, 김멍순. 이렇게 개가 당당히 자식으로 족보에 오를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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