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모님을 산소에 묻고~’
‘장모님을 산소에 묻고~’
  • 뉴제주일보
  • 승인 2024.03.06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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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문칠 작곡가·음악평론가·논설위원

무더운 여름 햇살이 따갑다. 아직도 몇 번의 장례 순서를 남겨 두고 있는 것인지를 알 수가 없다. 봉분(封墳) 작업을 마친 인부들이 천막을 철수한다고 일어나 다른 곳으로 가라고 한다. 급히 일어서다 바닥이 미끄러워서 뒹굴어 넘어지고 말았다. 그때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내가 결혼을 한지 42년째. 나와 아내는 한 달에 한번 꼴로 처갓집을 방문했다. 처갓집을 방문하면 장인과 장모님은 맛있는 식사를 준비해 주시는데 내가 좋아 하는 찌개와 반찬을 주로 마련해 주셨다. 그러나 장인의 식도락(食道樂)이 대단 하시므로 사위를 핑계로 회 안주와 소주를 마실 준비를 하기도 했다.

나도 과거에는 장인과 잔을 주고 받으면서 즐겁게 술을 들곤 했지만, 내가 술을 끊고 난 후로는 장인 혼자 술을 드시게 하는 것이 죄송한 마음이 컸었다.

식사와 술을 드시는 동안은 참으로 즐거운 대화의 자리가 됐다. 장인은 시인이면서 화가로 활동을 하고 계시는지라, 작곡가인 사위와 대화를 하는 것이 문학가인 장인과 사위 사이엔 예술이라는 공통점이 있어서 언제나 예술의 주제를 삼을 때 나는 마음이 좋았다. 장인이 하시는 예술에 대한 얘기와 인생사의 대화들은 참으로 흥미가 진진하였다. 장모님은 이러한 장인과 사위의 다정한 모습에 언제나 미소를 잃지 않으셨다.

사위가 찌개가 부족해 보이면 얼른 채워 주시고 언제나 충족함을 주셨다. 물론 아내도 이러한 분위기를 좋아 하는지 모든 일정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차안에서 조금 전의 장인과 사위의 대화 장면을 늘 흡족해 했다.

어찌 흐믓하고 좋았고 부러운 장면을 이것으로만 그칠 수 있을까?

정말이지 나는 결혼을 잘 했다고 여러 차례 되 뇌이면서 귀가를 했고 늘 살아가고 있었다. 나의 결혼생활과 처갓집의 방문에서의 일과는 거의가 똑 같은 패턴으로 돌아갔다.

그러한 장모님을 산에 묻고 산에서 내려 왔다. 처갓집은 대종손의 집으로 장모님은 결혼 후에 시댁의 종손 며느리로서 대소사를 모두 진두지휘를 하며 일을 말끔히 처리를 할 뿐만 아니라, 크고 작은 일을 발 벗고 나서서 집안의 일과 친족들의 안 살림을 말끔히 처리를 하는 그 모습은 흔한 대 종손 가정의 며느리의 헌신과 봉사를 보는 것이다.

산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사십구재(四十九齊)를 모실 절이 근처에 있어서 절에서 모시는 제를 드리고 돌아 왔다. 7일이 되는 날에는 식구들이 다시 절에 모여 초재(初齋)를 드리기 위해 모일 것이다. 그날을 기약하면서 제주시로 차를 몰았다.

그런데 조금 전 넘어 지면서 오른팔이 시큰거리더니 급기야는 오른팔을 전혀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아팠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정형외과를 방문을 했다. 어깨에 금이 갔다고 한다. 어찌 아픈지 팔을 들 수가 없을 정도로 시큰 거린다. 의사는 내일도 와야 한다고 한다.

병원을 다녀 온 후에 잠이 들었다. 피곤한 탓인지 밤새 꿈쩍도 하지 않고 잠을 잤다.

이튿날, 아내가 걱정이 되어 아내의 눈치를 살피게 된다. 그런데도 아내가 먼저 병원에 가야 한다고 한다. 내심 고마웠다. 아내도 피곤한지 닝겔 주사를 맞는다고 한다. 같이 병원 침대에 누워서 진찰을 받고 주사를 맞는다.

장모님이 돌아가신 후 몇 개월이 지나고 있다.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아내가 나 몰래 흘렸을 눈물과 걱정 근심이 이루 말로 다 할 수가 없을 지경이다. 부디 하늘나라에서도 근심 걱정이 없는 곳으로 가시고 늘 평안 하소서~.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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