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흔적 품은 마을…시들어 떨어진 애기동백, 희생자 모습과 겹쳐 
4·3 흔적 품은 마을…시들어 떨어진 애기동백, 희생자 모습과 겹쳐 
  • 뉴제주일보
  • 승인 2024.03.04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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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제주 남원 의귀마을 4·3길 1코스(2)
주민들이 억울하게 희생된 ‘의귀국민학교 동녘밭’
희생자 넋 기리는 위령비, 진혼서시·명단 등 새겨져
울창한 잡목 그늘서 잠시 숨 고르는 의귀천 쉼터 
눈길 잡는 커다란 헌마공신 김만일 묘역 표지석
남원읍 4.3희생자 위령비
남원읍 4.3희생자 위령비

■ 의귀국민학교 동녘밭

의귀로(99번)와 한신로가 만나는 의귀중앙교차로에서 북쪽 80m 지점 서쪽 길가에 ‘의귀국민학교 동녘밭’이란 안내판과 옆에 ‘서중면사무소 옛터’ 표지석이 있다. ‘동녘밭’에는 드문드문 감귤나무가 심어져 있고, 맞은 편 구석에 방풍용으로 심은 앙상한 삼나무들이 을씨년스럽게 보인다.

옛 의귀국민학교에는 1948년 12월 26일부터 1949년 1월 20일까지 제2연대 1대대 2중대가 주둔했었다. 군인들은 교실에 머무르면서 주민들을 무차별 검거해 학교 뒷편 창고에 수감했다. 그러던 중 1949년 1월 12일에 무장대가 이 곳을 기습했다. 그 일로 군인 4명이 전사했고, 무장대 수십 명이 사망했다. 토벌대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학교에 수용했던 주민 수십 명을 이 밭에서 집단 총살했다.

무장대 습격이 있은 후 1월 20일, 2연대 병력은 이곳에서 철수해 태흥리로 이동했다. 그래도 당시 총살당한 시신 약 80구는 수습이 허용되지 않았다. 그래서 흙만 대충 덮은 채로 방치되었다가 1년쯤 지나 마을 재건 과정에서 시신을 대충 수습해, 현의합장묘 옛터 세 개의 구덩이에 매장했다.

의귀초등학교 동녘밭
의귀초등학교 동녘밭

■ 남원읍 4·3 희생자 위령비

‘…무자․기축년/ 삶과 죽음의 계곡에서 환장하던 그 시절/ 무도한 총칼바람에 한 무덤 들꽃으로/ 사라져간 영령들이시여/ 칠십 리 길 쉬어가던 의귀원 자락에/ 영원히 잠들 서천꽃길 마련하여/ 그대 마중하리니/ 마을 들녘 감귤향이 온 동네에 퍼질 때면/ 그리운 부모형제 성님아우 삼촌조카/ 이웃 친지 얼굴 찾아 이곳으로 달려오세요 / 사멸(死滅)의 불바람이 휩쓸고 간 폐허의 시대/ 목숨 하나 간절했던 마르지 않는 눈물이여/ 땀 든 의장 눈물 수건 내려놓고/ 이제 고향의 언덕에서 영원히 잠드소서’ -오승국의 ‘진혼서시(鎭魂序詩)’에서

위령비 오른쪽에 마련된 오승국 시인의 ‘진혼서시’를 읽고 나서, 옆에 남원읍 4․3희생자 유족회에서 세운 ‘건립취지문’을 살펴본다. ‘4․3 소용돌이 속에서 좌우이념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순박하게 살아온 남원읍 주민 967명이 무고한 희생을 당했다.’라고 새겼다. 이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살아남았던 일부 주민들이 예비검속으로 희생되었으며, 불법재판으로 육지형무소에 수감된 선량한 주민들이 돌아오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남조로 의귀교(衣貴橋) 남쪽에 마련된 위령비는 앞면에 ‘남원읍 4․3희생자 위령비’라 했고, 옆에 따로 건립취지문과 진혼서시, 뒷면에 마을별로 희생자 명단을 새겼다. 구역을 돌아 나오는데 한 쪽에 심어놓은 애기동백이 끝물을 맞아 벌겋게 시들어 떨어지면서 그 위로 희생자들의 모습이 겹쳐 모골이 송연하다.

의귀천 쉼터
의귀천 쉼터

■ 의귀천 쉼터

위령비 구역을 나온 다음 북쪽을 향해 남조로를 따라 걷다 보면 길이 두 가닥으로 나뉘는데, 왼쪽으로 4․3길 표시가 되어 있다. 그 길을 조금 걸으면 의귀천을 만난다. 꽤 크고 넓은 내다. 천변(川邊)에는 구실잣밤나무를 위시한 잡목들이 울창하고, 냇바닥에 빌레가 있어 곳곳에 물이 고였다. ‘쉼터’는 이 길목의 나무 그늘에서 잠시 쉬어가라는 배려다.

1949년 1월 12일 무장대의 습격이 있고 난 뒤 남녀노소 없이 잡아다 보복 살인을 저지르자 살아있는 마을 사람들 중에는 더러 이 냇가로 피신했다. 이 냇가에는 숨어 지낼 만한 궤(암반에 굴이 형성되어 비바람을 피할 수 있을 정도의 굴)들이 있고, 식수로 사용할 물이 있어 당장 피하기 쉬운 곳이다. 그리고 지리도 익숙하고 마을이 가까워 밤에 몰래 집에 가서 먹을 것을 가져올 수도 있을 터였다.

김만일 묘역 안내석
김만일 묘역 안내석

■ 헌마공신 김만일 묘 입구

거기서 길을 따라 가다가 냇가와 헤어져 조금 더 가면 길가에 ‘헌마공신 김만일 묘역’이란 커다란 표지석을 만난다. 헌마공신으로 잘 알려진 김만일(金萬鎰)은 이 마을 이름에까지 영향을 끼칠 정도로 여기는 중요한 인물이다. 마을 홈페이지를 보면 의귀(衣貴)는 ‘선조 33년(1600) 임진왜란 당시 경주김씨 만일이 국난의 어려움을 인식하여 병마 500필, 1659년 이후 그의 아들 대길이 매년 500여 필의 병마를 조정에 헌납했고, 1724년 제주에 기근이 들자 대길의 손자 남헌이 비축미 1340석을 풀어 구휼하니 그 공을 찬양하여 1752년 영조가 비단옷 한 벌을 하사했다. 이에 임금이 하사한 옷을 받은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라 했다.

그래서 마을 출신의 중요한 인물을 그냥 놔둘 리 없었다. 비록 4․3길이지만 그 코스에 김만일의 묘역과 기념관을 거치도록 기획했다. 표지석에는 ‘18세기말 사마(私馬) 목장을 경영한 김만일은 총 1300여 필이 넘는 말을 바쳐, 인조 6년에 종1품 숭정대부에 제수 받아 헌마공신으로 길이 칭송되고 있다.’고 새겼다. 그리고 거기서 왼쪽 길로 접어들어 420m 되는 곳에 묘역이 있다고 이정표를 세웠다. <계속>

<김창집 본사 객원 大기자>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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