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서향’ 꽃샘
‘백서향’ 꽃샘
  • 뉴제주일보
  • 승인 2024.03.03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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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이다. 한주일 내내 푹하던 날씨가 지난 주말엔 다시 한겨울 같았다. 이까짓 추위쯤이야 하고 한경면 저지리로 향했다.

이맘쯤 이곳 ‘벳바른 궤’에는 겨우내 갇혔던 4·3 영혼들이 울어대고 ‘백서향’이 무리지어 피어난다고 한다.

백서향은 향기가 천리를 간다고 해서 ‘천리향’이라 부르는 꽃이다.

그 ‘백서향 향기축제’가 열리는 저지 녹색체험장을 찾아갔더니, 아니 내가 잘못 찾아왔나?

정말 한사람도 없었다. 텅빈 행사장에는 향토음식과 농산물 판매부스, 어린이 체험부스 등이 줄지어 선채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본부석 연단엔 축화 화환이 쓰러져있고. 그 싸늘한 정적을 뒤로하고 진눈깨비 날리는 행사장 골목길을 빠져나왔다.

▲초봄에 눈이나 진눈깨비를 만나는 일은 제주에서도 흔하다. 그래서 3월 추위는 낯설지 않다.

몇년전이었을까. 서귀포에서 봄비 속에 출발했는데 한라산을 넘어오면서 사방이 온통 설국이었던 적도 있었다.

경칩(驚蟄, 5일)을 앞두고 갑작스런 한기가 몰아치는 건 여한(餘寒). 봄 꽃이 피는 사이로 차가운 시베리아 매운 바람이 불어대는 건 ‘꽃샘’이다.

3·1절날 아침 기온은 기껏 해야 섭씨 2~3도였지만 체감 온도는 훨씬 더 낮았다.

그런데 추위가 상대적인 탓일까. 젊은이들은 반팔 옷을 입고 뛰어다니는 데, 패딩을 벗고나니 시린 바람이 살 속을 파고드는 느낌이었다. ‘꽃샘 추위에 설늙은이 얼어죽는다’거나 ‘환절기에 초상이 많이 난다’는 말을 제대로 알아듣는나이가 됐다는 신호다.

▲그래서인지 올 꽃샘 추위는 유난히 더 스산하기만 하다.

하지만 매운 바람이 제아무리 독하게 시샘을 부려봤자 거기까지다.

오는 계절을 막거나 거스를 순 없는 법.

다음 주말이면 여기저기에 개나리와 비슷하지만 줄기가 위로 뻗는 영춘화 노란 꽃망울이 터지고, 양지 바른 쪽엔 개나리와 진달래도 필 것이다.

그런 다음 벚꽃과 목련도 화려한 자태를 뽐내기 시작할 테고. 목련이 피기 전에 진눈깨비가 한번쯤 더 휘날릴지도 모르지만 그래봤자. 이제 봄, 여름, 가을이 저만치 줄지어있다.

아무리 꽃샘 바람이 세다고 한 들, 계절의 차례를 어찌 이길 건가.

옛사람들은 겨울이 지나가고 봄 비가 내리는 이 무렵에는 올해의 첫 번째 천둥이 치고, 그 소리에 대지의 생명들이 깨어난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명의 봄’에는 옛 시(詩)라도 읽어볼 일이다.

조선 영조 때의 기녀로 알려진 매화는 ‘매화 옛 등걸에 춘절이 돌아오니/ 옛 피던 가지에 피엄즉 하다마는/ 춘설이 난분분하니 필동말동 하여라’고 읊었다.

겨울과 봄이 혼재하고 있지만 춘분(20일)이 멀지 않았다. 기상 예보는 한두 차례 기온이 떨어지겠으나 이달 20일이후는 따뜻해져 꽃피는 시기도 평년보다 빨라질 것이란다.

‘봄눈 녹듯이 스러진다’는 말도 있듯이 아무리 한라산에 눈이 쌓여있어도 성큼성큼 다가오는 봄을 막지 못한다.

혹 새 봄을 맞아 무심코 지나버린 세월이 아쉬운 생각이 들면, 바람에 흘려 보내고 그늘진 마음 툭툭 털어낼 일이다.

인생의 황금시대는 흘러가버린 무지(無知)한 젊은 시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늙어가는 미래에 있다고 하니까.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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