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
기다림
  • 뉴제주일보
  • 승인 2024.02.27 18:1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가영 수필가

나카가와 요이치의 소설 ‘하늘의 박꽃’이라는 게 있다. 까뮈는 감히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견줄만한 작품이라고 극찬했다.

일곱 살 연상의 유부녀를 사랑하게 된 주인공의 23년간의 안타까운 사랑을 그린 얘기다.

1936년 이 작품이 발표되었을 때 일본 문단은 심드렁했다. 오히려 해외에서 번역이 되어 읽혀졌다. 프랑스어로 번역되어 까뮈의 극찬을 받았고 작품이 새로운 면모로 부각되었다.

오랜만에 꺼내 들고 다시 읽어 본다. 의연하면서도 겸손한 작품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간결한 기교로 인해 오히려 함축성이 살아있었다.

그것은 ‘박꽃’에 여자 주인공의 이미지를 두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밤에만 피는 박꽃. 이 꽃을 나는 무척 좋아한다. 요즘에는 잘 볼 수 없는 게 아쉽긴 하지만 내 기억 속에는 선명하게 남아있다. 그 아름다움과 슬픈 눈부심이.

어렸을 적 시골 이모 집에 가면 동네 조무래기들이 모두 모였다. 달빛 아래서 숨바꼭질을 하며 놀았다. 숨어있는 친구를 찾다 언뜻 초가지붕 위를 올려다봤다.

하늘엔 별들이 초롱초롱 떠 있고 초가지붕 위엔 하얀 박꽃이 별빛을 머금고 있었다.

그 박꽃의 흰색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노인이 된 지금도 조바심이 난다.

이제 겨우 그 박꽃의 하얌을 ‘깊이간다’는 표현이 가장 어울릴 것 같는 마음이다. 퇴색되지 않고 그대로 깊어가는 느낌.

여름 꽃이여서 이미 거기엔 가을이 있었지만, 색이 변할 필요는 없었다. 그윽함이 있으면 되는 게 아닌가.

어린 날의 기억과 마음에 간직한 추억이 거기에 있으니 그것으로 당당하다.
허름한 지붕 위를 덮듯 온통 하얗게 피어있던 박꽃은 내가 그리는 아름다움의 원풍경이다.

박꽃의 꽃말은 기다림이다. 

기다림은 믿음이 있어야 가능하다고 한다. 그래서 기다림은 연약함이 아니라 삶의 가장 중요한 순간을 빛나게 하는 힘이라 한다.

인간의 눈물의 총량은 불변이다. 누군가 한 사람이 울기 시작하면 누군가는 울음을 멈춘다. 누군가를 계속 울게 하지는 않는다. 그 말을 믿고 싶다.

기다림은 다른 것 같다. 노년이 되어 삶에 믿음이 없으니, 나는 기다리지 않는다.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