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들 겪었던 통곡의 역사-마을 문화·자연을 둘러보다
주민들 겪었던 통곡의 역사-마을 문화·자연을 둘러보다
  • 뉴제주일보
  • 승인 2024.02.19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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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제주 남원 의귀마을 4·3길 1코스(1)
4·3 아픔 새겨진 안내판 놓인 출발점 복지회관
의귀초 운동장서 문득 떠오른 4·3해원상생굿
곳곳에 ‘장판거리’라 새겨진 묵직한 돌 눈길
집단학살 시신들 옮겨 매장한 현의합장묘 터
출발점인 의귀마을 복지회관
출발점인 의귀마을 복지회관

■ 출발점, 의귀마을 복지회관

의귀리는 남원읍 가운데 자리잡은 중산간 마을이다. 동쪽에 신흥2리, 서쪽에는 한남리와 남원2리, 남쪽으로 태흥리, 북쪽에는 수망리가 인접한다. 마을 중심에서 한라산으로부터 흘러온 의귀천과 서중천이 서로 만나 바다로 흘러간다. 남쪽에는 표고 146.2m의 나지막한 오름인 넉시악이 마을을 감싸고 있는 비교적 안온한 마을이다.

그런 마을이었는데 1948년 11월 초순 다른 지역보다 일찍 시작된 군경토벌대의 강경진압작전으로 주민들은 한 순간에 삶터를 잃고 인근 오름과 숲, 궤 등에 숨어 살거나 산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끝나고 보니 많은 주민들이 군경토벌대에 잡혀 희생 되었거나 육지 형무소로 보내졌다.

복지회관 마당 구석에 세워 놓은 안내판에는 ‘이들 중 대다수는 지금까지 생사를 알 수 없는 4․3 행방불명인으로 남아 있다. 4․3으로 인한 의귀마을 희생자는 250여 명에 이른다.’고 썼다. 의귀4․3길은 당시 토벌대가 주둔했던 의귀초등학교를 비롯해 현의합장묘, 송령이골 등을 돌아보며, 주민들이 겪었을 통곡의 역사와 마을의 문화와 자연을 둘러보는 코스다.

옮겨 새로지은 의귀초등학교
옮겨 새로지은 의귀초등학교

■ 의귀초등학교 교정에서

1코스와 2코스가 조금 떨어진 관계로 먼저 1코스 ‘신산루 가는 길’(7㎞, 약 2시간 거리)을 돌아보기로 했다. 학교 운동장으로 넘어서면서 문득 2008년 4월 13일(일요일) 이곳에서 있었던 4․3해원상생굿이 떠오른다. 제주특별자치도가 주최하고 ㈔한국민속예술인총연합 제주도지회에서 주관했던 그 때 행사는 4․3 60주년을 맞아 ‘제15회 4․3문화예술축전’의 일환으로 실시한 ‘찾아가는 현장위령제’였다.

당시에는 옆 마을인 수망리와 한남리 영령들과 아울러 굿판이 행해졌는데 이곳 의귀리 255위, 수망리 104위, 한남리 109위 등 도합 468위가 그 대상이었다. 제상(祭床) 뒤편에 병풍처럼 두른 신위(神位) 명단을 바라보며 한동안 먹먹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 학교는 넓은 운동장에 커다란 건물을 자랑하고 있지만 4․3 당시에는 이 곳에서 조금 동쪽에 작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1948년 12월에 이 학교에 토벌대가 주둔하면서 마을 사람들의 희생이 커졌다. 정문을 나서 주변을 살피니 이 학교 졸업생들이 영전 또는 당선됐거나 대학에 합격한 것을 축하하는 등의 축하 플래카드가 울타리를 거의 휘감고 있어, 그에 위안을 삼으며 장판거리로 발걸음을 옮긴다.

장판거리빗돌
장판거리빗돌

■ 장판거리를 지나며

장판거리라 해야 지금은 의귀사거리에서 한신로를 거쳐 의귀로와 만나는 의귀중앙교차로를 지나 제3의귀교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곳곳에 묵직한 돌을 박아 ‘장판거리’라 새겼다. 가까운 곳에 당시 서중면사무소가 있었고 그를 중심으로 2일과 7일에 장이 열린 것이다.

‘서중면’은 일제강점기 그들의 식민정책에 맞춰 변경한 행정구역의 하나다. 1913년 기존의 제주․정의․대정군의 3군제를 폐지해 제주군으로 통폐합했으며 제주면을 중심으로 산남을 우면(右面), 좌면(左面), 중면(中面) 하는 식으로 나누고 산북은 양쪽을 각각 둘로 나누어 신좌면(新左面), 구좌면(舊左面), 신우면(新右面), 구우면(舊右面)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1935년에 대정면과 구좌면을 제외한 면 이름을 지금 쓰는 이름으로 바꿨다.

옛날 장터를 생각하자 시장하고 목이 말랐으나 아무리 살펴도 이 곳에는 먹거리 파는 곳이 보이지 않는다.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려 길을 건너고 보니 마침 편의점이 있어 막걸리 한 잔으로 옛날 장터 기분을 내고 출발이다.

현의합장묘유허지 구역.
현의합장묘유허지 구역.

■ 현의합장묘 옛터

네거리에서 동쪽으로 400m 떨어진 곳 바로 길가에 옛터가 있었다. 한편에 거욱대처럼 나지막하게 돌탑을 쌓아 올리고 가운데 안내판을 세웠다. 둘레에는 야트막하게 돌을 쌓아 울타리를 만들고 문을 달았다. 바닥에는 잔디 비슷한 왜란을 심고 가운데 ‘현의합장영령유허비’를 세웠다. 한 켠에는 ‘현의합장묘 전경’이라 하여 4장의 유허비 조성과정 사진을 붙였다.

안내판에는 ‘이 곳은 4․3 당시 의귀초등학교에 주둔했던 군인들에 의해 주민 80여 명이 집단학살 당한 후 학교 동녘 밭에 흙만 대충 덮인 채 방치되었던 시신들을 옮겨 3개의 구덩이에 매장한 곳이다.’라고 썼다.

2003년에 들어서야 세 구덩이의 유해를 발굴하였는데 수습이 힘들 정도로 헝클어져 있어 당시의 참혹했던 상황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서쪽 구덩이 17구, 가운데 구덩이 8구, 동쪽 구덩이 14구 등 총 39구의 유해와 50여 점의 유품이 함께 발굴되었다.

발굴 직후인 9월 20일 수망리 ‘신산마루’ 지경에 새 묘역을 준비하여 안장하였다. 세월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이미 흙으로 돌아간 유해도 다수 있어 흙 한 줌으로 대신하였다 한다. 이곳에는 2010년 5월 19일에 유허비를 세워 그 자취를 알리고 있다. <계속>

<김창집 본사 객원 大기자>

4·3해원상생굿.
4·3해원상생굿.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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