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부양 거부’ 소명서
‘부모부양 거부’ 소명서
  • 뉴제주일보
  • 승인 2024.02.18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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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면 반갑고 가면 더 좋다”고들 하지만 부모 마음은 늘 자식 보고픈 것이 인지상정이다.

자식 보고싶은 어느 할머니가 짜낸 묘책이 지혜롭다. 은행에서 돈을 찾아다 놓고 손자들이 집에 올 때마다 ‘노란 신사임당’ 하나씩을 꺼내줬다. 손자들은 용돈이 궁할 때마다 주말에 할머니댁에 가겠다고 하고, 그 덕에 할머니는 자식들 얼굴을 자주 보게 됐단다.

아들이나 며느리가 올 때마다 장롱 속 집 문서나 토지 문서를 일부러 꺼내보이곤 하라는 ‘조언’도 있다. 웬만큼 재력이 있다는 사실을 과시해야 최소한의 대접이라도 받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긴 한데, 돈이 없으면 어떻게 하나.

▲단순히 우스개만은 아니다.

최근 가족관계 연구기관이 내놓은 ‘실태’를 보면 부모를 가족으로 본다는 응답이 2005년 90%대에서 2010년에 77%대로, 2020년에는 50%이하로 떨어졌다. ‘배우자의 부모(시부모와 장인장모)는 가족’이라는 대답은 2010년에서 50.5%에서 2020년에는 30%대로 급감했다.

사실 우리 동네의 실태를 보면 ‘가족관계의 그늘’은 적나라해진다.

제주시가 지난 6년간 자식들의 부양 거부, 기피로 인해 생활이 어려운 부모들로부터 기초생활보장 신청을 받고 이를 조사하고 난 후에 수급 자격을 부여한 사례가 4173가구에 달한다. 기초수급자가 되려면 자녀의 소득과 재산이 일정 기준을 넘지 않아야 하는 데, 이 4173가구부모 자녀의 소득과 재산은 일정 기준을 초과한 경우다.

▲살기 힘든 부모가 기초생활수급을 받으려면 자식에게 전혀 도움을 받지 못한다는 ‘소명서’를 내야하고, 지방생활보장위원회의 승인을 받아야한다.

신청자 중에서는 ‘가짜’도 적지않은 탓인지 지방생활보장위원회의 심의는 까다롭다. 이를 통과하려면 자녀들의 부양기피와 거부를 입증하는 사례 등 속살같은 가정사를 그대로 드러내야한다.

“내 자식을 죄인으로 만드는 것 같다”며 포기하는 노인이 적지 않은 이유다.

더 이야기를 들어보면 가슴이 먹먹하다. 어느 할머니는 “자식이 부양을 안하는 사정을 최대한 불쌍하게 써내라는 얘기를 듣고, 망서리고 망서리다가 눈물을 쏟으면서 글을 썼다”고 했다. 또 어느 할머니는 “(관계 당국이) 아들에게 부양 의사를 확인한다는 데, 못할 짓을 하는 것 같다”며 가슴을 쥐어 뜯는다.

그렇게 지난 한 해에도 제주시 관내 564가구 노인들이 소명서를 썼다.

▲자식에게 박대를 당한다 해도 변하지 않는 게 부모 마음이다.

자식 없이 부부 나름의 인생을 추구하는 ‘통크(Tonk, Two only,no kids)족’을 추구하는 이들이 늘어난다지만 그건 생각뿐인 것 같다.

요즘 경매 넘어가는 집과 토지의 상당수가 자식 빚보증 서느라 잡힌 경우가 많고, 자식에게 기대지 않겠다면서도 자식을 위해 희생하며 노후준비를 못한 사람이 대다수라는 것만 봐도 그렇다.

불교경전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에 “목숨이 있는 동안 자식의 몸을 대신하길 원하고, 죽은 뒤에는 자식의 몸을 지키길 원한다”고 했다.

우리 주위엔 늙고 병들어 허허롭게 방치되는 부모가 생각보다 많아졌다.

이제 우리 사회가 힘들어진 부모들을 따뜻하게 안아주어야 할 때다.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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