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서 가장 우울한 나라? 겉은 화려하지만 속은 골병든 나라? 단순한 명제가 복잡한 실상을 왜곡시킬 수 있음을 잘 알지만, 단순한 명제가 갖는 규정력을 무시할 수도 없다. 어떤 명제가 복잡한 실상의 본질을 선명하게 드러낼 때는 더욱 그렇다. 그 명제가 복잡한 실상을 이해할 수 있는 길라잡이가 되기도 하고, 현재의 모습을 되돌아볼 수 있는 각성제가 되기도 한다.
위의 두 명제는 마크 맨슨이라는 미국 작가가 우리나라에 대해 내린 진단이다. 한 작가의 평가에 우리가 일희일비할 필요는 없다. 다만 그가 그런 평가를 내린 근거에 대해서는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는 한국이 유교와 자본주의의 장점을 무시하고 단점을 극대화한 결과 우울증 환자가 많고 자살률이 높은 나라가 되었다고 진단한다. 이런 평가는 익숙하면서도 생소하다.
우리는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이라는 표현에 익숙하다. 70년대 이후 고도 성장을 달성한 한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를 가리킨다. 서양 제국주의의 식민지를 겪은 가난한 나라였지만, 해방 이후 강력한 정부 주도로 경제적 근대화를 달성한 나라들이다. 다른 대륙에서는 비슷한 사례를 찾기 어려웠기에, 전세계는 그 원인 분석에 골몰했다. 거기서 찾아낸 명제가 ‘유교자본주의’였다.
유교와 자본주의는 동아시아에서 전근대와 근대를 상징하는 두 단어였다. 서로 결합되기 어려운 명제였다. 그런데 동아시아에서는 두 단어가 만나 새로운 경제성장 모델을 규정하는 명제가 되었다. 교육을 존중하고, 근면절약하고, 조직에 충성하고, 개인보다 집단을 중시하는 유교윤리가 자본주의 경제를 성장시킨 요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설명은 1997년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경제가 국제통화기금 관리 하에 들어가면서 나락으로 떨어졌다. 이 시절에 아시아적 가치는 부패, 연고주의, 불투명성 등을 야기한 장본인으로 지목받았다. 긍정의 명제가 부정의 현실을 낳은 아이러니가 되어 버렸다. 역시 인간의 개념은 현실의 역동성을 뛰어넘을 수 없나 보다.
유교와 자본주의 자체는 선악의 판단을 넘어서 있다. 좋으냐 나쁘냐는 너무나 주관적인 평가다. 시간은 분절을 허용하지 않는다.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은 항상 이어져 있다. 우리는 그 흐름 속에서 현실을 통째로 인식해야 한다. 좋은 의도가 항상 좋은 결과를 낳는 것이 아님도 알아야 하고, 과거의 영광이 미래의 암울을 낳을 수 있음도 알아야 한다.
끝으로 이 질문은 던져야겠다. 유교의 본질은 무엇인가. 유교도 죄가 없고, 공자도 죄가 없다. 공자야말로 그 시대 문제 해결에 최선을 다한 사람이다. 답도 없고 끝도 없는 질문을 다시 던지는 이유는 그야말로 답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답이 없는 질문을 계속 던져야 한다. 그것이 새로운 창의성을 낳을 것이고, 공동체의 건강성과 지속성을 보장할 것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유교의 본질은 사(私)보다는 공(公)을 리(利)보다는 의(義)를 강조함에 있다고. 그래서 돈이면 다 된다는 생각은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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