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부부를 춤추게 한 겨울 농부
노부부를 춤추게 한 겨울 농부
  • 뉴제주일보
  • 승인 2024.02.05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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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중훈 시인·성산일출봉농협조합원

눈이 오다 갠 날 팔십 넘은 노인 부부가 조그만 텃밭에 나와 있다. 지난 가을 파종해둔 월동무밭을 둘러보기 위해서다.

눈으로 덮인 무밭이 예상외로 싱그럽게 살아있다. 험한 겨울 추위에도 불쑥불쑥 얼굴 내민 무밭의 표정이 밝고 맑다. 몇 평 안 되는 텃밭에 소일거리로 손을 댄 보람이 제법 있다. 나뭇가지에 걸터앉은 혹한의 겨울바람도 신이 난 듯 가볍게 춤을 춘다. 농사를 하네 못 하네 다투던 아내의 표정마저 굵은 무뿌리처럼 실하다.

그러나 그러한 기쁨도 잠시뿐이다. 이웃한 밭 젊은이가 던진 쓴웃음 한 마디 때문이다. 

“삼춘, 올해 뭇값은 기대하지 맙써!” “그냥 줘도 안 가져 감수다.”

지난해 그렇게 잘나가던 뭇값이 올해는 처치 곤란이라는 뜻이다. 과잉 생산 탓인 거다. 값이 좋았다는 소문에 너도나도 덤벼든 욕심의 결과다. 아깝지만 무밭을 갈아엎어 파쇄시켜 버리겠다고 한다. 노부부의 그간 수고 역시 예외는 아니다. 조금 전까지 좋아하던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나뭇가지에 좋아라 걸터앉은 입춘의 기운마저 찬 서리 되어 서럽다. 

어느새 젊은이의 손에 꺾인 죄 없는 소나무 삭다리만 밭 모퉁이로 끌려와 모닥불로 타고 있다. 조그만 불씨엔 그나마 안타깝던 마음도 옮겨붙어 죄송스레 녹아들더니 노인이 들고 온 막걸리로 함께한 젊은이들과 아픔을 달랜다. 실패한 농사로 마음 상한 말들도 오간다. 소일거리 삼아 저지른 나의 행실이야 별것 아니지만 농사를 생업으로 삼고 있는 후배들 처지가 걱정된다는 말을 건넸다.

그런데 그들의 답은 그 반대다. 도리어 상황 모르는 노인을 진작에 말리지 못한 자신들이 미안하고 죄송스럽다는 말로 위로한다.

“삼춘, 잊어 붑써!” 농사란 매해 잘 되는 경우보다 잘 안 되는 경우가 많으니 실망하지 말자는 뜻이다. 자신들도 포기하지 않겠다고 한다. 다음 또 다음 해 그것도 아니면 또 다음 해를 기대하겠다는 말이다.

기다림의 미학을 가진 젊은이들이다. 그렇다. 인생사란 참고 기다림에 있는 것. 실패한 농사일수록 그 경험과 기다림의 교훈은 크고 깊다. 그 끈질긴 도전과 노력의 대가는 몇 년 없어 훌륭한 결실로 돌아온다는 걸 그들은 알고 있다. 그것이 농사의 기본이며 철학이다. 노인 역시 한때 젊은이들 못지않게 혼을 심던 농사꾼 시절이 있었기에 그걸 안다.

이럴 때 노인은 소년기의 기억을 떠올린다. 홀어미의 외아들로 자라면서 혹독한 가르침을 받으며 자랐던 기억이다. “애비 없는 호로자식이란 말을 듣지 않으려면 밭에서 농사짓는 법부터 배워라!” “학교에서의 배움만 공부가 아니다!” 방과 후, 주말, 방학 때면 으레 밭에 나가 김을 매게 하였으며 등짐으로 집과 밭 구간을 오르내리는 노역의 인내도 가르치셨다. 마구간에서 퇴비를 만드는 법도, 그걸 밭에까지 지고 나르는 수고로움의 가치도 깨닫게 했다. ‘農者天下之大本’(농자천하지대본)이란 말은 밥 먹듯이 들었다.

이제 노인은 한동안 잊고 살았던 소년기의 경구를 이들 젊은이에게서 새롭게 듣는다. 지금 우리 사회는 이러한 경구는 고사하고 미래를 보는 눈, 인내하는 마음조차도 보기 힘들다. 오늘, 긍정의 사고로 내일을 지향하는 이 고장 젊은 농군의 모습을 보면서 노부부의 표정은 전에 없이 밝고 젊다. 그들 젊은이에게 영광 있으라!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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