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운(天運)
천운(天運)
  • 뉴제주일보
  • 승인 2024.01.30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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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순진 시인

황당한 사고를 당했다. 남들에겐 흔하디 흔한 일일 수 있지만 내겐 30년 운전 경력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우리 삶에 기적, 천운이 있다는 말을 믿지 않았었다. 삶의 이치는 노력에 의해서만 운행된다고 믿었을 뿐. 천운은 ‘하늘이 정한 운명’라는 뜻도 있지만 ‘매우 다행스러운 운수’라는 뜻도 있다. 내게 일어난 일은 2번에 가깝다. 그러나 깊이 따져보면 1번이 없는 2번은 존재하지 않는다.

겨울 안개비가 추적이던 날 서귀포로 가기 위해 5.16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마지막 학기 수업 날이다. 아이들과의 이별을 아쉬워하며 S자 길을 막 꺾을 때였다.

어떤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바퀴가 휙 꺾이더니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쓩 날아 도로 옆으로 고꾸라졌다. 과속도 아니었고 미끄러울 정도의 길바닥도 아니었다. 가야할 곳으로 굴러가야할 바퀴가 비틀어지더니 구석진 곳으로 쳐박히는 순간, 나는 아찔했다. 공중에서도 엔진이 폭파하면 어쩌나 하는 드려움보다, 학교 수업은 어쩌지 하는 걱정이 앞서 구덩이에 쳐박혔을 때도 얼른 밖으로 나가려 애썼다. 내 몸보다 지키지 못할 약속에 마음이 괴로웠다.

다행히 엔진은 꺼지지 않았다. 차량 바닥이 난리겠지. 비가 축축 내리고 있었고 차들은 계속 밀려오고 있었다. 일단은 학교에 전화해서 수업 불가능함을 전했다. 그 다음 보험회사에 전화했다.

“차를 견인하려 합니다.”
“주소와 사진 보내 주세요.”
조금 기다리더니 톡이 왔다.

“사진 상황을 보니 견인차로는 불가능하고 대형차로 끌어올려야 할 것 같아요.”
그러라고 하고는 한참을 차 속에서 기다렸다. 5.16도로를 들락거린 지가 삼십년도 넘는다. 무사고였다. 단한번 두렵다는 생각도 해보지 않았다. 나와 같은 상황처럼 길 옆에 박혀있는 차들을 보면 ‘서행하는데 왜 사고가 나지?’하며 의아해 했었다. 이제야 알 것 같다. 조심했는데도 기이하게 닥쳐오는 일처럼 생겨나는 상황이었다는 걸. 인간은 본인이 경험하고서야 깨닫는 후천적 불능 동물이다.

대형차를 기다리며 남편, 딸, 아들에게 일일이 전화했다. 모두 왈,

“천만다행이네. 다른 사람도, 엄마도, 차도 안 다쳤으니, 기적이네!”

문득 살아오면서 황당했던 어느 순간들이 뇌리를 스쳐간다.예상치 않게 다가왔던 사람들, 엉뚱한 일들로 꼬여버렸던 상황들, 일정한 주기로 찾아왔던 위기와 기회의 매듭들이 공중에서 회향하고 있었다. 그랬다. 위기와 기회는 천운처럼 오고 갔다.

영화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나오는 대사가 떠오른다. ‘실제로 운명을 결정하는 드라마틱한 순간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사소할 수 있다.’ 이 사소한 사건 이후 5.16도로만 고집하던 운전을 남조로로 바꾸었다.

길을 바꾸니  보이지 않는 풍경들이 눈에 들어온다. 교래휴양림, 돌문화공원, 서프랴이즈테마공원, 에코랜드, 사려니숲, 파파빌레…

천운은 길을 바꾸게 하고, 길을 바꾸니 눈도 마음도 새로이 열게 한다. 위기 또한 기회를 만나기 위한 전조임을.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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