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융
혼융
  • 뉴제주일보
  • 승인 2024.01.23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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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은자 수필가

서사를 소재로 한 공연이 근엄하게 펼쳐졌다. 주관자는 무용 융합콘텐츠를 전공한 K감독으로 서울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그녀는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 ‘일무’를 이수한 전통 무용가이기도 하다. 더군다나 그녀의 고향인 제주의 전통문화를 예술로 승화시키며 창작활동을 통해 제주문화 알림이 역할에도 힘을 기울이고 있다. 

지인에게서 그녀에 대한 프로필을 듣고 사뭇 기대되었다. 과연 서사를 춤으로 풀어낼 수 있을까? 게다가 융합이라는 새로운 시도다. 춤으로 신화를 보여주는 창작공연인 만큼 서사 내용을 알고 있다면 흥미로움은 배가 되리라. 하지만 무작정 지인을 따라온 터라 내 머릿속의 서사 내용은 희미한 정도이다. 어쩌면 작자는 관객에게 신선함을 주기 위해 ‘낯설게 하기’로 새롭게 시도했을지 모른다. 

조명이 꺼지고 관객들은 숨을 죽였다. 신이 강림한다는 신호인가? 고요를 깨는 맑은 설쇠(무구) 소리가 캄캄한 가운데 어느새 사방으로 막힌 공간을 장악하였다. 긴장감이 함께 몰려왔다. 설쇠는 징과 달라 꽹과리 소리처럼 가늘다. 실내에 가두어진 소리는 야외 굿판에서 들을 때와는 느낌이 사뭇 다르다. 마치 천상에서 내려오는 울림 같다. 신의 세계로 빨려들듯, 이미 몰입되어 거기에 현실의 나는 없다. 어두운 공간에 조명 대신 서서히 스크린이 빛을 발하며 한줄기 향연(香煙)이 피어오른다. 

무대에 올려진 영상 콘텐츠와 혼융(渾融)을 이루는 작품 제목은 ‘동이, 풀다’이다. 제주 무속의 동이 본풀이를 모티브로 하였다. 작품에서는 “당신의 동이는 무엇입니까?”라고 묻고 있다. 무슨 뜻일까? 여태껏 한 번도 생각한 적 없는 부분이다. 스크린에서 끊임없이 올라가는 향연 줄기는 이승을 떠나는 영가의 상징인가. 그렇다면 어찌 삼가 위로와 평안을 말하지 않으리오. 

설쇠를 치는 사람이 어둠에서 드러나고 심방이 음송하며 등장한다. 북과 징도 함께 자리한다. 심방이 새ᄃᆞ림 사설을 구성지게 읊고, 서서히 무용수가 등장하여 영혼에 빙의 된 듯 춤을 춘다. 동이의 몸짓에서 슬픈 상념이 겹치며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른다. 영상과 춤의 절묘한 조화가 관객을 사로잡았다. 무형의 서사가 예술작품의 소재가 될 만큼 소중한 가치가 깃들어 있음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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