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림 속에 숨은 농경시대 제석단이 있던 제석오롬
수림 속에 숨은 농경시대 제석단이 있던 제석오롬
  • 뉴제주일보
  • 승인 2024.01.18 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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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 제석오롬
번영로 상에서  바라보면 돌오롬과 제석오롬이 새의 알개처럼 겹쳐졌다 열려졌다 한다.
번영로 상에서 바라보면 돌오롬과 제석오롬이 새의 알개처럼 겹쳐졌다 열려졌다 한다.

제석오롬은 서귀포시 표선면 하천리 429-1번지, 해발87.5m, 비고48m이다. 오롬이라고 보기엔 부끄러운 것은 봉긋한 오롬은 마치 언덕 같은 원추형 오롬이다. 제주시에서 동쪽 중산간을 횡단해표선까지 이르는 번영로는 제주시 지경에서는 왕복 4차선이지만 조천읍으로 들어서면서부터는 왕복 2차선 도로다. 쭉 빠진 길이 좋다고 무심코 달리다간 제석오롬을 놓쳐 버린다.

제석오롬을 찾아간다고 하다가 입구를 놓쳐 버려서 표선리까지 거의 다가서 “아차 길을 놓쳤나 보다!” 하고 차를 돌려왔던 기억이 나서 속력을 줄이고 천천히 방향을 잡는다. 제석오롬을 찾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안다고 하여도 찾아가기가 쉽지 않다. 너무나 작은 오롬이기에 그렇다. 제일 쉬운 방법은 돌(ㄷ+아래아+ㄹ)오롬(봉화대가 있었던 ‘돌산봉’)을 거쳐서 가는 방법이다.

번영로에서 제석오롬으로 들어가기 전에 바라보면오롬과 제석오롬 두 오롬은 마치 두 개의 오롬이 한 마리의 갈매기가 날개를 펴고 퍼득이는 것 같은 모습이였다. 돌(ㄷ+아래아+ㄹ)오롬과 제석오롬으로 갈 때마다 갈매기가 날개 치는 듯하다. 두 개의 봉우리 중에 앞에 보이는 게 오롬(돌산봉)이고 뒤에 보이는 게 제석동산으로 두 오롬은 하나의 오롬이라 해도 좋을 것 같다.

돌(ㄷ+아래아+ㄹ)오롬 정상에는 조선시대의 봉화대가 있었다. 그러나 봉화대는 마치 주인 잃은 묘지(골충)같은 모습이다. 봉화대 자리에서 동북쪽으로 내려와서 둘레 길을 돌아 나온다. 산림도로가 보인다. 그 길에는 딸기꽃이 하얗게 피어서 오롬 둘레 길을 덮었다. 가끔 나무딸기가 보이고 솔잎과 낙엽만 수북하다. 어느 초여름날 다시 와서 산딸기를 따 먹을 수 있을까?

“왜 제석오롬일까?” 이는 불교 제석천(帝釋天)에 귀의하는 자를 수호하며 아수라의 군대를 징벌한다는 하늘 임금이다.(Daum백과) 이 역시 본래는 불교적 의미였다. 어쩌면 남방불교의 제석단이었을 수도 있으나 남방불교가 불당이 없는 곳에 밖에다가 단을 모셨다는 곳을 찾을 수 없고 제주 어디에도 불교의 단을 절이 없는 야외에 세운 전례를 찾을 수 없다.

다르게 생각해 하기로는 1000년 이전에도 제주도는 농업이었기에 농경신에게 제사 드리던 제단으로 보는 게 옳아 보이기도 하다. 우리 고향 동내에도 ‘제석동산’이란 지명이 있는 것을 볼 때, 옛날에는 농경을 위해서 야외에 제단을 쌓았던 곳들이 곳곳에 존재해 있는 것을 볼 때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는 일이다.

겨울 속에 꽃처럼 보이는 사위질빵열매가 눈처럼 희게 보인다.
겨울 속에 꽃처럼 보이는 사위질빵열매가 눈처럼 희게 보인다.

700년 전 고려 충렬왕 20년(1276), 몽골의 행정관료+군사(1400명), 왕족+유배자(170여 명)들이 보내졌다. 공민왕 때(1374) 1230명의 몽골 이민자들이 제주에 살았다. ‘동국여지승람’은 원나라 11성(조(趙), 이(李), 석(石), 초(肖), 강(姜), 정(鄭), 장(張), 송(宋), 주(周), 진(秦), 양(梁))과 운남(雲南)을 선향 삼는 안(安), 강(姜), 대(對), 좌(左)씨 등의 성씨가 700여 년 전에 이민와서 살았다.

필자가 어린 시절, 1950년 후반에 할머니들은 젊은 처녀들이 몸에 딱 붙는 청바지 같은 것을 입으면 혀를 차시며 말씀하셨다. “거 뭐라 따비가랭이 골(ㄱ+아래아+ㄹ)이...” 그러셨다. 제주에는 ‘따비’라는 농기구가 있었다. 목초지를 개간하며 농사 지경을 넓혀갔다. 쟁기나 삽으로는 도저히 땅을 뒤집을 수 없었는데 따비를 이용하여 삽처럼 땅을 일구었는데 이는 한국에 없는 농기구다.

필자는 어릴 적 2월이면 산과 들에 ‘방애불’타는 걸 늘 보아왔다. 그래서 진독(진드기)도 가시덤불도 타서 질 좋은 목초가 자랐다. 오롬, 제석오롬 일대는 일찍이 농경이 시작된 곳으로 보이나 돌(ㄷ+아래아+ㄹ)오롬, 제석오롬은 목축하기에 적소로이다. 그렇다면 이 제석단은 농경신을 위한 단이기보다 몽골 이민들이 이민 온 이후에는 목축을 위한 제단으로 쓰였던 것으로 보인다.

제석오롬으로 가려면 돌(ㄷ+아래아+ㄹ)오롬을 거쳐서 갈 수밖에 없다. 제석오롬으로 나가는 큰 나무 아래는 한 뼘밖에 안 되는 자금우 붉은 열매가 겨울을 빛낸다. 이월이 지나면서부터 오롬에서 제석오름오롬으로 나가는 사잇길, 산딸기 피고 들꽃 피던 산길에 눈처럼 하얀 사위질빵 꽃씨가 하얗다. 해변에서 불과 2~3㎞ 밖에 안 되는 이 벌판 중에 불쑥 솟은 돌(ㄷ+아래아+ㄹ)오롬을 거쳐서 제석오롬으로 나가는 길, 경계를 이루는 그 길에 새봄에 피어날 봄꽃들이 그립다.

우마가 조용히 모였다. 흩어져도 그 자리를 지키는 오롬을 보라! 마치 섬을 감싸던 바닷물이 몰려왔다 밀려 나가듯 세월이 가면 자연도 그렇게 변하나 보다. 옛 친구(老朋友)가 그립듯 옛 산이 그립다. 그러나 제주는 개발과 보존의 갈등을 풀지 못하고 지금도 엉거주춤한 상태다. 자연보호라는 명목으로 껴안고 살수 만도 없으니 우리의 지혜가 필요한 때이다.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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