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제주 사이의 역사문화 엿보기
나주·제주 사이의 역사문화 엿보기
  • 뉴제주일보
  • 승인 2024.01.08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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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영택 ㈔질토래비 이사장·귤림서원 원장

제주문화원 향토문화연구팀 일원으로 전라도 나주 등지를 다녔다. 왕건의 29후비 중 둘째 부인의 고향인 나주의 옛 이름은 금성이다. 전국에서도 고색창연하다는 나주객사 이름은 ‘금성관’이다. 보물로 지정된 금성관 뒤로 보이는 산이 금성산이다. 제주의 뱀 설화에 등장하는 바로 그 산이다. 일제 등을 거치며 천 년의 고도 나주의 읍성·성문·서원 등도 파괴되었으나 지금은 복원되어 있다. 

나주읍성 근처에는 ‘표해록’의 저자 금남 최부를 알리는 대형 안내판도 있다. 나주향토문화회관에서도 주요하게 전시되고 있는 인물이 최부이다. 세계 3대 중국 표해록의 저자로 알려진 최부는 1487년 추쇄경차관(推刷敬差官)으로 제주에 왔었다. 추쇄경차관이란 사라진 노비·범법자들을 찾아내 원래 자리로 보내는 관리이다.

‘탐라 시 35수’를 짓기도 했던 최부는 1488년 부친상을 당해 일행 42명과 바다를 건너다 추자도 인근에서 풍랑을 만나 표류 14일 만에 절강성 연안에 표착, 중국 체류 135일 만에 북경을 거쳐 압록강을 건너 귀국한다. 

필자는 나주문화원장의 안내로 금호 임형수 제주목사의 묘역을 참배하는 행운을 얻기도 했다. 1545년 을사사화로 홍문관 부제학에서 좌천되어 제주목사로 온 금호는 다음 해 문정왕후에 의해 파직된다. 2년 후 벌어진 정미사화로 사사되니 그의 나이 34세였다.

제주목사 시절 송사를 엄정하게 행하고, 특히 교육기관인 김녕정사와 월계정사를 단장하여 제주의 젊은이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던 그다. 죽음 직전 아들에게 ‘배우지 아니하면 무식하니 배우기는 하되 과거에 응시하지 말라’고 말하고는 사약을 여러 번 마셨으나 죽지 않자 손수 목매 자결한다.

부친의 죽음을 목도한 장자 임구는 제주에 건너와 지내다 한경면 고산리 당산봉에 묻히어 제주 입도조가 되고 1567년 신원 된 임형수는 1850년 귤림서원 영혜사(永惠祠)에 배향된다. 

아버지 임진 목사를 뵈러 1577년 제주에 온 백호 임제는 제주여행기인 ‘남명소승’을 남긴 당대 최고의 풍류객이자 문호였다. 나주 근교 영산강이 보이는 언덕에 위치한 임제문학관에는 제주 현무암 돌도 전시되고 있다. 평형수처럼 배의 균형을 잡는 평형석으로 쓰였던 돌일 게다.

나주에서 영산강 물길 따라 20여 킬로 가다 보면 영산포에 이른다. 탐라선인들이 바다를 건너와 마소와 해산물 등을 교역하던 그 옛날 포구 근처 어디에는 ‘제민창’이 있었다. ‘제창마을’에 있었다는 제민창은 제주선인들을 구휼하려 마련된 구휼미 쌓는 창고였다. 제주선인 구휼미 창고로는 시기를 달리하며 갈두진창·나리포창·제민창이 있었다. 숙종 때 영암 땅끝 마을에 세워졌던 갈두진창은 영조 때 금강하류 나라포창으로, 정조 때 나주 근처의 영산강 유역으로 옮겨 제민창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제주에서는 구휼미 값을 해산물로 갚았을 게다. 

바다를 사이에 둔 천 년의 두 고을에 오간 문명의 씨앗을 생각한다. 그리고 옛것을 복원하여 품고 있는 나주가 부럽기도 한 여행이었다. 교류를 통해 역사문화가 빚어내는 문명의 새로운 시기를 맞고 있음을 실감하는 요즈음이다.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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