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잔한 큰 만(灣) 뒤로 펼쳐진 주변 섬들 장관
잔잔한 큰 만(灣) 뒤로 펼쳐진 주변 섬들 장관
  • 뉴제주일보
  • 승인 2024.01.04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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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의 섬이자 수산자원이 풍부한 접도(接島)
수품항 방파제 상공서 내려다 본 접도.
수품항 방파제 상공서 내려다 본 접도.

# 1987년 대교 건설로 섬이 아닌 섬

바람과 구름조차 판소리가 되고 부지깽이만 잡아도 사군자 그림이 그려진다는 곳, 대패만 잡아도 목수가 되고 발을 내딛기만 하면 춤꾼이 된다는 곳이 진도다. 본섬 진도를 중심으로 크고 작은 수많은 섬이 있는 진도. 때문에 유배지로도 유명하다. 고려 중기인 1122년 이영이 최초 유배자를 시작으로 오랜 세월 진도는 제주도와 함께 최적의 유배지가 됐고, 많은 유배인이 유형을 살고 간 유배의 끝자리였다. 진도읍 의신면 금갑리 접도(옛 지명 금갑도)는 면적이 4.476㎢, 해안선 길이 18.3㎞의 크지도 작지도 않은 유배의 섬이었다.

그동안 흑산도와 우의도 등 유배 섬을 다녔기에 접도가 유배 섬이란 기록을 보고 찾아 나섰다. 버스를 타고 30여 분 달리자 진도의 남서쪽 끝 금갑리와 접도 북서쪽 끝을 잇는 접도대교가 나온다. 대교라 하지만 버스하나 겨우 다닐 정도로 좁은 길이 200m 다리로 1987년에 건설됐다. 다리를 지나 멀지 않은 오른 쪽에 원다리 마을이다. 이 곳이 유배인들이 생활했던 곳으로 마을 입구 한편에 ‘유배지 공원’이란 안내판이 세워 있다.

접도대교가 개통돼 접도는 오기 힘든 섬이 아니라 차 타고 편안히 드나들 수 있는 섬이 됐다. 버스 종점은 수품항이다. 진도의 대표적 항구인 수품항은 국가지정 제1종 어항으로 4개의 무인도가 나란히 넓은 바다를 막고 있어 태풍이 몰아쳐도 별 영향을 받지 않는 천혜의 항구가 되고 있다. 물양장에는 각종 어구며 양식장 시설물들로 꽉 들어차 발 디딜 틈이 없을 지경이다.

비릿한 냄새가 풍기는 어구 사이를 돌아 방파제 쪽으로 나가자 데크로 만든 해안 산책로다. 멀쩡한 것 같은데 출입이 통제 표식이 붙었다. 방파제 위에 올라서면 수품항이 한 눈에 보일 것 같은데, 돌아갈 수도 없어 염치불구하고 넘었다. 데크 서너 곳이 파손돼 위험해서 출입통제하고 있는 모양이다. 방파제에 올라 드론을 띄워 수품항을 보니 장관이다. 접도는 큰 만(灣)이 두 개가 형성돼 있다. 남동쪽에 있는 여미만은 수심이 깊고 파도가 잔잔해 좋은 항만을 이루고 있고, 서쪽 해안은 해식애가 발달한 절벽지대이다.

수품항 주변을 돌아보고 길을 따라 걷다 보니 접도 마을이다. 활어차와 수산물 실은 차들이 쉴새 없이 드나드는 것을 보면 수품항 주변 양식장이 많은 모양이다. 무거운 짐 지고 혼자 걷는 것이 쓸쓸해 보였던지 화물차가 서면서 “어디까지 가는지 차를 타라”고 한다. 얼른 탈까 했으나 어렵게 왔으니 걷는 데까지 걸으며 섬을 본다는 생각에 “고맙지만 멀지 않은 마을에 갈 겁니다”라고 전하며 감사 인사를 했다. 아주 작은 배려지만 섬사람들 인심에 감정이 울컥 해 진다.

섬 서쪽끝 해안절경지.
섬 서쪽 끝 해안절경지.

# 해안 절경지를 도는 트레킹코스-유배공원 ‘눈길’

시간이 되면 걸으며 섬 구석구석을 돌아보는 것이 좋아 걸어 다니고 있는데 사람들 눈엔 초라하게 보였던 것일까. 조금 걷다 보니 남망산 등산로 입구다. 안내도를 보니 남망산 정상을 거쳐 섬 서쪽 해안 절경지를 도는 트레킹코스는 쥐바위-남망산-병풍바위-솔섬바위-선달봉망터-해안가-말똥바위로 이어지는 7.1㎞ 구간 3시간 50분이 소요된다. 전 코스를 돌 시간은 없고, 남망산 정상만 올라갔다 오면 시간은 버스 시간을 맞출 수 있을 것 같아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잘 다듬어진 등반로, 크지 않은 숲길, 이 숲길은 아름다운 숲길로 선정, 공존상을 받아 유명하다. 숲길 사이 시야가 트이는 공간으로 보이는 진도 주변 섬 모습은 언제봐도 아름답다. 바쁘게 걸었던지 남망산(165.9m) 정상까지 30분 만에 올라 사방을 촬영하고 언제 시간이 되면 남망산 웰빙 코스를 꼭 돌겠다 생각하며 원다리 유배마을 입구에 있는 유배공원으로 향했다.

금갑도(현 접도)원다리 마을은 유배인들이 살았던 곳, 그 중에서 유와 김이익과 무정 정만조는 대표적인 유배인이다. 갑오개혁 끝자리 해 1896년 이른 봄, 무정 정만조와 안국선이 금갑도로 유배왔다. 정만조는 조선 대유학자요, 시문 특히 반려문에 뛰어난 문객이었다. 유배인 중 김약행은 1788년 한글로 쓴 ‘적소일기’를 유와 김이익은 ‘순창록’을 썼고, 무정 정만조는 유배지 주민과 함께한 이야기를 시로 읊은 유배문집 ‘은파유필’을 남겼다.

정만조는 유별나게 진도와 금갑도의 자연, 역사, 민속과 주민들을 사랑해 자신의 신분을 버리고 들녘사람들과 예인들과 술잔을 나누며 느껴온 감정과 유배생활을 시로 역어 ‘은파유필’ 상하권으로 남겼으나 지금은 상권만 남았다. 당시 가르친 제자로 의제 허백련 화백과 우리나라 최고 서예가 소전 손재형으로 전해오고 있다. 유배공원 안내판에 적힌 유배역사를 살펴보고 접도 대교를 천천히 걸어서 건넜다. 걸어온 길 돌아보며 ‘옛 유배인들은 배를 타고 저 섬으로 들어가면서 어떤 심정이었을까’ 여행자의 마음으로 어찌 유배자의 심정을 조금이라도 헤아릴 수 있을까. 짐을 잔뜩 실은 화물차가 좁은 다리를 달려나오고 있다.

<서재철 본사 객원 大기자>

접도마을.
접도마을.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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