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서쪽 끝의 해넘이 명소인 고산리 물노리오롬
제주 서쪽 끝의 해넘이 명소인 고산리 물노리오롬
  • 뉴제주일보
  • 승인 2023.12.28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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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 물노리오롬

제주시 한경면 고산리 3763번지에 소재한 물노리오롬(노꼬믈오롬)은 차귀오롬(당산봉)에서 바라보면 한경면 고산평야(뜰) 끝에 자리 잡고 있다. 물노리오롬의 높이는 해발 78m, 비고 73m로 해변 5m에서 분화한 오롬이다. 그래서 물노리는 그 한쪽 자락을 바다에 담그고 있는 완전한 해변 오롬으로 그 풍광이 아름답고 특히 황혼빛이 아름다운 오롬이다.

물노리오롬의 서쪽 끝, 해안절벽은 바닷물에 깎여 해안 기슭에서 바라보면 오롬 절벽이 마치 절단된 것처럼 보이는 해안단애 현상을 보인다. 이런 특이한 층리현상은 성산읍 청산오롬(일출봉), 대정읍 절워리(송악산)에서 보이는 해식애(海蝕崖)와 같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중산간에서 분화한 기생화산들에 비하여 물노리(수월봉)나 절워리(송악산)는 훨씬 더 일찍이 형성된 오롬들로 일찍이 ‘유네스코 지질공원’으로 지정됐다.

필자의 견해는 물노리오롬은 본래 만주어 ‘믈’이 믈리→물로리→물노리로 변화됐을 것으로 본다. 이는 대정현(현재, 대정읍) 절리(절워리→송악산)로 불려진 것과 비슷한 시대 비슷한 지역인 대정현에 속해 있던 마을들인 것도 비슷하다. 본래 물노리(수월봉)는 1956년에 이르러 한림읍과 한경면이 분리될 때 대정읍에 속하여 있던 고산리·용수리·용당리 세 마을과 함께 북제주군 한경면으로 편입되었다.

물노리는 조선시대 지도에 표기되면서 믈(물노리)를 음차한 것이 믈은 수(水)로, 은 월(月)로 표기하므로 ‘수월봉(水月峰)’이 된 것이다. 전설에는 ‘1910년 오위장군을 지낸 ‘수월공 고지남’의 숭모비가 세워져 그 호를 따라 수월봉이라 했다’는 말은 전혀 무관한 말이다. 수월봉이라 불려진 것은 이조시대이다, 또한 오롬이 먼저 있었고 그 지역에서 출생하거나 성장한 사람들이 그 지역에 있는 오롬 명칭 등을 따서 호로 삼는 게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물노리’가 소재한 한경면 고산리는 고려 때는 자귓뱅듸·노구메라 불렸다. ‘태종실록’(16년 5월)에는 차귀현, ‘세종실록’(29년 6월)에는 차귓포·차귓개, 고산(高山:노꾸메)·당산(堂山:차귀오롬)이 나타난 것은 1701~1702년 ‘탐라순력도’에서이다. 1872년 ‘제주삼읍전도’·‘제주지도’에서도 고산·당산으로 나타난다. ‘고산’은 제주어 ‘높구메(노꾸메)’의 음차이다.

일제강점기 때 1/50000 지도에는 차귀도의 섬들인 와도(눈섬)·차귀도(자귀섬)·죽도(대섬)·서비여 등의 섬들이 처음 표기되었다, 또한, 국가사적 제 412호인 ‘고산선사유적지’가 나타난 것을 보면 고산은 아주 오래전 설촌 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고산2리에서는 신석기시대 조흔문토기·적갈색경질토기 등이 발견된 것을 보면 오래전에 선주민들이 살아온 것으로 보인다.

또한, 고산리는 본래 제주목이 아니고 대정현에 속했었다. 역사적 관점에서 모슬포 절은 절(파도)+(오롬)이라는 뜻이다. 또한, 믈은 물가에 솟아오른 오롬으로 믈(물)+(오롬)이 믈(물리)’가 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바다로 툭 튀어나온 것 같이 바다에 떠 있는 섬 같은 함덕 서모봉(서우봉)도 본래 섬+(=섬오롬이 섬우봉이 섬무 犀牛(무소)봉이 된 것이다.

또한, 어떤 이는 ‘수월이와 녹고(노꼬) 오누이가 살았는데 그 오누이의 어머니가 병들어서 오누이가 어머니 병을 고치려고 절벽에서 약초를 캐러 갔는데 절벽에서 약초를 캐던 수월이가 그만 절벽에서 떨어져 죽게 되어서 그 후로 이 오롬을 ‘노꼬믈(노꼬가 흘리는 눈물)’이라는 엉터리 전설을 만들어 내었다. 수월과 노꼬는 같은 명칭(수월=노꼬)이니 우스운 이야기다.

이 오롬 기슭에는 노꼬물이란 샘이 있어서 노꼬물오롬, 벼랑에서 물이 떨어지므로 물노리오롬, ⑤오롬 모양이 물 위에 뜬 달과 같고, 석양에 비친 달과 같다 하여서 물놀이오롬이라고 해석했다니 우습다. 이는 ‘믈’을 음차한 한자, 수월(水月)을 잘못 해석 한 말이며, ‘믈→믈리’라는 만주어를 이해하지 못한 까닭이다. 이 말은 몽골 이민자들이 오기 전(탐라시대)부터 사용하던 말이다. 그래서 몽골 이민자들도 북방어인 이 말을 같이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제주인들은 ‘높구메(노꼬메)’라는 이름도 함께 썼던 것 같다. 그러나 려몽연합세력이 약화 되고 조선은 북방언어를 배제하고 함께 쓰이던 노꾸메에서 고산(高山)이라는 지명을 채용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 마을은 몽골 이민자들이 들어오며 커졌지만 목호의 난으로 고산-용수리 앞바다는 피바다가 되었었다. 여명연합군(최영장군)은 몽골인, 그 가족과 관계를 맺은 이들, 몽골 옹호자들까지 모두 살육했으니 이 땅은 아벨의 피가 절규하는 애절한 땅이다.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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