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과물해변에서
겨울, 과물해변에서
  • 뉴제주일보
  • 승인 2023.12.19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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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가영 수필가

겨울이 깊어지면 곽지 과물해변을 찾는다. 여름의 웅성거림을 비워낸 곳. 먹구름이 끼고 매서운 바람에 일렁이는 파도, 침묵하지 않는 그런 겨울 바다가 좋아서다.

데리비드 린 감독의 ‘가장 훌륭한 영화는 아닐지라도 가장 아름다운 영화’라는 극찬을 받은 라이언의 처녀를 떠올린다. 과물해변은 그 영화의 배경이 된곳 아일랜드의 작은 마을과 너무도 흡사하다. 사정없이 불어대는 바람, 높게 일렁이는 파도, 황량함. 그런 겨울의 느낌이 닮았다.

지난겨울 여행길에서 우연히 라이언의 처녀를 다시 봤다. 경기도 어느 실버 극장에서 상영하고 있었다. 무료였다. 대학 시절 감명 깊게 본 영화를 다시 보게 되다니, 주저 없이 들어갔다. 

1916년 영국으로부터 독립운동을 벌이는 아일랜드의 바닷가 작은 마을. 그곳이 비밀운동의 거점이 된다.

그 절박한 시기에 마을의 유일한 선술집 딸 리지는 나이든 교장선생님과 결혼을 한다. 그녀의 일방적인 밀어부침으로 한 결혼이었다. 그렇게 적극성을 띤 결혼이었지만 첫날 밤에 선생님에 대한 환상은 깨지고 만다.

무료해진 그녀는 다시 선술집에 나와서 소일한다. 어느 날 젊고 아름다운 영국군 장교가 부임해 온다. 전쟁으로 몸과 마음이 이미 지쳐있는 남자. 그러나 그에게는 시리도록 아름다운 우수가 있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사람은 첫눈에 반해 사랑에 빠지고 만다.

누가 얘기했던가. 사랑은 반사회적이며 파멸의 힘을 가진 거대한 그 무엇이라고. 그 사랑엔 반드시 대가를 요구한다.

정념의 불장난으로 파멸을 예상하는 눈 가려진 사랑을 연기하는 크리스토퍼 죤스의 슬픈 눈. 그 눈은 내게도 통증이었다.

외도하는 아내를 지켜보는 선생님, 로버트 밋챰의 깊은 침묵도 아프긴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밀회는 들통이 나고 온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렸다. 더 이 이상의 질시와 굴욕을 참을 수 없는 선생님은 리지를 데리고 떠난다. 그 시간 장교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몰아치는 바람, 일렁대는 파도. 베토벤의 영웅 2악장이 흐른다.

만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인연도 있다. 만신창이여도 만날 수 밖에 인연도 있다.

깊은 절망의 추억은, 청춘의 잔해로 남아있음을 과물해변에서 음미한다.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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