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우리는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 뉴제주일보
  • 승인 2023.12.11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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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제주지역사회교육협의회 부회장

“묵념 시간의 길이는 밥 일곱 숟가락 먹을 만큼이다.”

제사를 지내고 있는 아들 삼형제에게 아버지는 언제나처럼 뒷짐 지고 서서 코칭을 하신다. 여느 때처럼 듣고 넘겼을 그 말씀을 그날은 나도 모르게 말대답이 나왔다. 아버지 말씀을 듣고 자란 우리는 아버지 말씀대로 유교식 전통에 따라 조상님을 모시겠지만 손자 세대는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고 있고 벌초 때도 손자들은 참여하지 않고 있는 현실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도 벌초를 하는 것도 우리 세대가 마지막일 것이라 말씀을 드렸다. 그렇게 하면 되느냐 당장에 불호령이 떨어져야 했을 터였다. 서운함이 크셨을 터인데 그날은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두 달 뒤에 친족들이 모여 1000여 평 되는 선산의 봉분을 평장으로 전환하는 문제를 논의하는데 차마 당숙님들에게는 말하지 못 하고 머지않아 벌초할 사람이 없으니 화장을 해서 한 곳으로 모아야 될 것이라고 아버지에게만 조용히 말씀을 드렸다. 답을 들으려고 말씀을 드린 것이 아니었지만 놀랍게도 아버지는 당신이 돌아가시면 화장을 하라고 말씀을 하셨다. 그 후 일주일 만에 아버지는 밭일을 하시다가 갑자기 쓰러지셨고 다시 일주일이 지나 명을 달리하셨다.

당숙님들 모두 화장은 상상조차도 하지 않는 분들이셨고 아버지 세대의 화장에 대한 두려움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돌아가신 아버지, 평생을 유교식으로 고집하시던 분인데 화장을 하라고 했던 단 한 번의 말씀이 당신 진심인지, 아들의 주장에 마지못해 대답해준 것일 뿐이었는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화장의 필요성을 말씀드리고 싶었던 그날 연구직 수의사로 평생을 사신 아버지께 죽음에 대해 아버지의 언어로 말씀을 드렸다. 단독주택에 살게 되면서 화초와 나무를 키워보니 식물의 번식방법은 씨앗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줄기를 꽂아 놓아도 새로운 개체가 되고 잎이나 뿌리는 물론 꽃으로도 새로운 개체를 만들어 낼 수 있으니 식물은 인간처럼 부모 자식으로 구분해서 대를 이어 간다기보다 다양한 자기 복제를 통하여 영생을 이어가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설명 드렸다. 

리차드 도킨슨이 ‘이기적인 유전자’에서 말한 것처럼 인간인 우리도 유전자를 통해서 영원히 살아가는 것이고 아버지의 외모는 물론 성장하면서 아버지와 교감한 적도 없고 가르침이 없었는데도 많은 점들이 아버지와 닮아 있음을 느낀다. ‘이것은 유전자에 새겨진 정보에 의한 것으로 저는 아버지의 복제품이고 손자 또한 저와 아버지의 복제품인 것 아니겠습니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조문을 온 친족들이 아버지 말씀을 하나둘 전하기 시작하였다. 한 달여 전에 십 여 년 만에 찾아오셔서 어떻게 사는지 보고 가셨고 말씀을 나누다 가셨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먼 친족들을 찾아보시며 세상을 떠날 마음의 준비를 이미 하고 계셨던 것이다.

죽음에 대한 평생의 믿음을 바꾸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아버지 빈소를 아들과 지키던 날 저녁 아들이 아버지의 말을 전한다. 할아버지가 며칠 전에 전화가 와서는 “할아버지는 이제 곧 죽는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아빠와 현수를 통해서 영원히 살아가는 거야”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아들이 전하는 아버지의 말씀으로 자식들과 인사조차 나눌 수 없었던 갑작스런 죽음조차도 아버지에겐 큰 미련이 아니고 효도라곤 해 본 적 없는 아들에게도 큰 위안이 되었다.

어렸을 적 아버지가 전해 준 맥아더 장군의 말이다.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우리가 영원히 사는 길은 나를 이어 세상에 적응하고 세상을 바꾸어갈 2세를 낳는 것뿐이다.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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